집의 옷 밥을 언고 들 먹 져 雇工(고공)아, 우리 집 긔별을 아다 모로다.
비오 일 업 면서 니리라. 처음의 한어버이 사롬리려 ,
○위에 적은 고문(古文)은 임진왜란 직후 허전이라는 양반이 고공(雇工)의 인생을 통하여 조선의 상태를 풍자한 고공가(雇工歌)의 일부입니다. 고공이란 ‘품삯’을 받는 일용근로자입니다. ‘세경’이라는 대가를 주인으로부터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머슴과는 구분이 됩니다. 조선후기 자본주의적 농업경영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이 고공입니다. 그런데 노동력 제공의 대가로 곡식이나 재물 등 화폐 이외의 일정한 금전적 가치를 등가교환하는 것 자체는 만국공통이고, 그 기원도 고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을 축조한 사람의 중추가 바로 일용근로자였습니다.
○21세기 현대에서도 근로의 본질은 4천 년 전 피라미드를 쌓기 위해 돌을 졌던 일용근로자의 그것과 동일합니다. 그것은 노동력의 제공입니다. 민법 제655조는 ‘노무제공’이 근로자의 본질적 의무이고, 사용자는 ‘보수제공’이 등가교환의 의무임을 명확히 규정합니다. 근로기준법은 ‘보수’를 ‘임금’이라는 현찰로 한정합니다. 그러니까 민법은 고대부터 이어왔던 화폐 이외의 등가교환물도 긍정하는 반면에, 현대의 근로기준법은 ‘현찰박치기’만을 인정하는 셈입니다. 민법은 근로자의 ‘노무제공’에 대하여도 규정하는 반면에, 근로기준법은 근로자의 권리를 중점적으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근로기준법의 규정과 무관하게 근로자의 ‘노무제공’이라는 본질적 의무는 변함이 없습니다.
○민법 제390조는 ‘채무자가 채무의 내용에 좇은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에는 채권자가 채무자에 대하여 채무불이행책임을 추궁할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근로자는 노무 제공이라는 채무를 사용자에 대하여 지고 있습니다. 동시이행의 항변권 등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근로자의 노무제공의무의 불이행에 대하여 금전배상이라는 민법상 원칙적인 배상의무 외에 근로기준법은 간접적이나마 징계권이라는 권한을 사용자에게 부여합니다. 사용자의 징계권은 근로자의 노무제공의무가 간접적인 근거가 됩니다. 노무제공의무 자체가 부정되면 징계권은 그 존립 근거가 상실됩니다.
○그러나 노무제공의무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리고 바람이 부나에 관계없이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노무를 제공할 만한 터전을 사용자가 만들어 줘야 합니다. 그리고 노무제공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근로자가 사용자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이기에, 사용자는 이에 대비해야 합니다. 이를 대법원(대법원 2000. 3. 10. 선고 99다60115 판결)은 ‘사용자가 근로계약에 수반되는 신의칙상의 부수적인 의무로서 근로자에 대하여 부담하는 보호의무’라고 서술합니다. 대법원이 뜬금없이 족보도 없는 의무를 인정할 리는 만무하고, 서양의 법학자들이 오래전부터 학설로써 인정했던 의무입니다. 근로자의 근로제공의무의 한계요소로 사용자의 보호의무가 작동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사용자의 보호의무를 현실화하는 것에는 돈이 듭니다. 때로는 거액이 소요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용자가 보호의무를 현실화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용자가 보호의무를 불이행하는 경우에 근로자는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 의문에 법률은 보장책을 규정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제52조가 규정한 ‘작업중지권’입니다. 작업중지권은 실은 사용자가 적극적으로 보호의무를 이행하면 존재할 필요성이 현저히 적습니다. 그러나 돌발상황이라는 것이 있기에, 근로자가 적극적으로 행사할 공간이 존재합니다.
○작업중지권은 야누스의 얼굴입니다. 근로자의 근로제공의무를 불이행한다는 측면과 사용자의 보호의무의 대행이라는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남용의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의미입니다. 보호의무를 핑계대고 대충 일하거나 아예 안 할 수도 있는 ‘무적의 방패’가 될 수 있습니다. 산안법 제52조 제1항은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를 권리의 요건, 즉 근거규정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조문의 증명책임은 근로자가 부담합니다(증명책임의 분배에 관한 법규기준설). 다음 <기사>의 비극은 바로 이 규정의 근본적 결함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작업중지권이 현실에서는 유명무실하다는 비판마저 있었고, 삼성물산이 작업중지권을 전면보장한다는 획기적(!)인 뉴스(2021. 3. 8.)가 뜨기도 했습니다.
○다음 <기사>에서는 작업중지권을 무려(!) 2016년에 행사한 사실로 징계를 받은 근로자의 법정투쟁이 담겨 있습니다. 본질적으로는 사용자의 보호의무의 범주에 있는 작업중지권, 즉 사용자의 보호의무의 대행이라는 성격의 권한을 행사한 근로자가 오랜 법정투쟁 끝에 2023년에야 비로소 징계의 부당성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작업중지권은 남용의 소지가 큰 것이기는 하지만, 사용자가 부담하여야 할 보호의무를 사전에 점검하는 방법이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산안법상 사업주의 안전보건의무를 고용노동부와 산업안전보건공단이 점검하여야 할 현실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용자의 보호의무를 대행한 근로자가 억울하게 징계를 받는 비극을 막아야 합니다.
<기사> 대법원이 독성물질이 누출되자 대피를 지시한 노동조합 간부를 징계한 것은 부당하다며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처음으로 인정했습니다. 대법원 1부는 지난 2016년 세종시에서 발생한 황화수소 누출 사고 당시, 인근 공장에서 조합원 29명과 함께 작업장을 빠져나왔다가, 정직 2개월 징계를 받은 노동조합 지회장이 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 상고심에서, 징계를 취소하라는 취지로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사고 당시 산업재해가 발생할 정도의 급박한 위험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징계가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사고 지점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공장에서도 피해자들이 나왔고, 피해 범위를 명확하게 예측하기 어려웠다"며 징계가 부당하다는 취지로 판단을 뒤집었습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214/0001310826?sid=102 <대법원 판례> 근로계약에 수반되는 신의칙상의 부수적인 의무로서 근로자에 대한 보호의무를 부담하는 사용자에게 근로자가 입은 신체상의 재해에 대하여 민법 제750조 소정의 불법행위책임을 지우기 위하여는 사용자에게 당해 근로로 인하여 근로자의 신체상의 재해가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회피를 위한 별다른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은 과실이 있음이 인정되어야 하고, 위와 같은 과실의 존재는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근로자에게 그 입증책임이 있다. (대법원 2000. 3. 10. 선고 99다60115 판결) <산업안전보건법> 제52조(근로자의 작업중지) ① 근로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 ② 제1항에 따라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한 근로자는 지체 없이 그 사실을 관리감독자 또는 그 밖에 부서의 장(이하 “관리감독자등”이라 한다)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③ 관리감독자등은 제2항에 따른 보고를 받으면 안전 및 보건에 관하여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④ 사업주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다고 근로자가 믿을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때에는 제1항에 따라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한 근로자에 대하여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아니 된다. <민법> 제390조(채무불이행과 손해배상) 채무자가 채무의 내용에 좇은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에는 채권자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자의 고의나 과실없이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제655조(고용의 의의) 고용은 당사자 일방이 상대방에 대하여 노무를 제공할 것을 약정하고 상대방이 이에 대하여 보수를 지급할 것을 약정함으로써 그 효력이 생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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