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단역과 조역을 전전하는 배우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만나 대화를 하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조역이나 단역을 전전하는 사람들도 주연을 꿈꾸고 있으며, 자기가 맡은 배역상의 연기를 하는 순간에는 주연으로 여기고 연기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후 다른 조연급 배우나 무술감독, 그리고 무술연기자, 드라마PD, 드라마 제작사 사장인 친구 등을 만나 동일한 질문을 했는데, 모두 한결같이 그것이 맞다는 내용의 답변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돈만이 목적이라면 열악한 출연료를 감수하고 단역이나 조역을 연기하는 배우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연기 자체가 사람을 매료하는 마력이 있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신의 얼굴이 등장할 때의 쾌감이 배가되는 호르몬이 분비되는 것과 같은 다른 그 어떤 직업에서는 볼 수 없는 엄청난 자부심이 생기는 배우라는 직업의 독특한 매력이라 봅니다. 마약중독에 비유하면 과도한 것이겠지만, 배우에게 연기라는 것은 중독성이 강한 것은 분명합니다.
과거에 국민드라마로 자리매김했던 ‘전원일기’에서 신충식은 자신의 부인으로 무려 20년간 출연했던 이수나에 대하여 애틋한 애정을 갖고 있다고 회고를 했습니다. 그들은 둘 다 조연급 배우로 배우인생을 보낸 분들입니다. 누구나 주연을 하고 싶어 하지만, 주연배우로 출연하는 분들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연기 자체가 주는 마력이 그들을 배우의 길을 가게 만듭니다. 조연배우들은 돈만 생각한다면 배우의 길을 굳이 선택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수나라는 배우는 사학의 명문 고려대, 그것도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여성이었습니다. 소시적에는 미모도 수려했고 키도 훤칠했습니다. 그러나 이수나는 불행하게도 주연으로 눈에 띄는 활약을 한 적이 없습니다. 만년 조연이나 단역으로 배우이력을 써내려갔습니다. 다른 조연급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이수나도 주연을 꿈꾸었겠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riIXhLMtrc
이수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78년 어린이 드라마 ‘X 수색대’라는 드라마였습니다. 흑백TV시절의 저예산 드라마로 제가 국민학생시절의 드라마였습니다. 당시 어린 나이의 제 눈으로 봐도 무척이나 엉성한 SF드라마였습니다. 방송국 내부의 스튜디오촬영임에도 우주공간이라거나 외계별이라는 억지 상황설정은 열성팬이었던 저와 제 친구들마저도 쓴 웃음을 저절로 짓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재미는 있었기에 꾸준히 봤습니다. 주연으로 등장했던 손창민의 잘생긴 얼굴이 무척이나 부러웠지만, 여학생으로 등장하는 신민경이 무척이나 귀엽다고 눈여겨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수나는 여기에서 외계인 악당으로 등장을 했습니다. 비닐껍질(?)과 같은 요상한 복장을 하면서 손창민 등 X 수색대원들인 아이들을 괴롭히는 역할이었는데, 그 표독한 표정이 정말 생생하기에 이수나라는 여자는 실제로도 나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악랄하거나 야비한 표정을 짓는 것이 영락없이 악당 그 자체 였습니다, 물론 이수나라는 이름은 당연히 몰랐지만, 당시 아이들이 부르듯이 ‘나쁜 X' 또는 ’악당 X'이라고 이수나를 부르곤 했습니다.
아이들의 눈이라는 것은 단순하기에, 드라마 속의 인물들을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대별하여 이해를 하고 또 그렇게 부르기 마련입니다. 아무튼 이수나는 동 시대의 ‘수사반장’에서도 사기꾼, 악덕포주, 인신매매사범 등 이계인과 더불어 범인배역의 단골(!)로 출연을 했습니다. 이수나 개인도 이러한 악역이 얼마나 싫었을까 지금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당시에 이수나가 등장하면 기분이 꿀꿀하곤 했습니다.
그런 이수나가 ‘전원일기’에서는 천연덕스럽게 시골아낙으로 분해서 열연을 하기도 했으니, 이수나의 연기력은 수준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울대 출신의 김태희가 연기력에서는 혹평을 받는 것처럼 배우의 연기력과 학력은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름 엘리트여성이라는 프라이드가 강했던 이수나가 만년 조연배우로 출연했을 때의 허전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수나는 2016년에 쓰러져서 아직도 온전한 상태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고혈압환자와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모습으로 온전히 되돌아오기는 어렵겠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 와서 이수나 특유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농익은 연기를 펼치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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