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보드카가 러시아의 대표적인 국민주가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보드카는 무엇보다도 웬만한 재료만 있으면 쉽게 만들 수 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좋은 자연환경을 가진 나라와 달리 자연조건이 열악한 러시아로서는 큰 매력이다. 또 가격이 저렴하고, 어떤 자리에서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장점 때문에 대중 술로 자리 잡기에 알맞았다. 여기에 보드카를 증류한 후 그 증류액을 여과시킬 때 사용되는 숯의 주원료인 자작나무는 러시아 타이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종이다. 이는 위스키나 코냑의 숙성에 쓰이는 오크나무가 없는 러시아로서는 장점이 아닐 수 없었다.
-2011. 8. 19.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의 ‘신동아’ 기고문 중에서-
위의 글은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의 ‘보드카’에 대한 기고문 중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이어진 글에는 전 러시아 대통령 옐친이 보드카에 푹 빠져서 생긴 민망한 해프닝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쓰려는 내용은 당연히 옐친과 보드카에 대한 에피소드이겠지만, 그 행간에 담겨있는 보드카가 ‘러시아의 국민술’이라는 메시지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러시아 하면 보드카, 보드카 하면 러시아를 연상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일부 폴란드 국민이 무척이나 불편해한다는 전언이 있습니다. 보드카의 원조는 폴란드가 맞다는 것이 그 불편함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보드카 같은 전통주에 특허가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단지 술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구권을 상징하는 술이라는 점도 의문이 없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한국에서 보드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반공광풍’이 맹렬했던 상황에서 공산권을 상징하는 술인 일련의 보드카 광고가 불을 뿜었다는 것입니다. 그 보드카는 제조사 진로의 초성을 다분히 연상하게 하는 동시에 러시아 등 동구권 인명을 연상하게 하는 ‘로진스키’, 그리고 보드카 시장의 승자인 롯데의 ‘하야비치’, 그리고 존재감이 없이 사라진 ‘알렉산더’가 있었습니다. 로진스키는 지금은 고인이 된 박상규 가수와 당시 인기절정의 고우영 만화가가 메인모델이 되어서 CF를 찍었고, 하야비치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애청하던 ‘수사반장’이라는 당시 최고인기 드라마의 주인공 최불암이 메인모델이 되어서 CF를 찍었습니다. 보드카 전쟁은 다음의 두 광고에서 실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광고모델의 비중이 해당 광고를 집행하는 기업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만큼 보드카 시장이 뜨거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Cl8qdmaGhU
https://www.youtube.com/watch?v=FQxMe7a6Ijo
당시 언론에서 ‘보드카 전쟁’이라 부를 정도로 보드카의 수요가 폭발했다는 점은 바로 이 광고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TV광고는 물론 신문, 잡지 등 당시 매체에서 보드카 광고는 불을 뿜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대중주에 불과한 보드카에 대한 수요가 폭발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보드카 이전에 술 자체에 대한 한국인의 선호는 의문이 없습니다. 삼국유사 등 국사책에서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사연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한국인의 DNA에는 ‘음주친화적 DNA’가 들어있습니다. 당장 사극에서 주막이나 주루가 등장하지 않거나 음주 장면이 없는 경우를 찾기가 어렵고, 박정희, 전두환 정부시절의 시대극에도 당연히 술이 등장합니다. 심지어 시바스 리갈은 박정희를 상징하는 양주이기도 합니다.
당시 ‘양주’의 실체는 수입산 원액주가 아닌 이상 대부분 기타제재주에 불과했습니다. 주류회사는 ‘블렌딩’이라는 말로 국민을 헷갈리게 했지만, 블렌딩은 원액에 국산주정을 섞은 술입니다. 심지어 아직까지 전설로 남은 ‘캪틴큐’나 ‘나폴레옹’과 같이 국산주정만으로만 주조한 기타제재주도 있었습니다. 당연히도 기타제재주가 대유행한 것은 술꾼들의 취향을 반영한 것입니다. 술꾼들은 소주, 맥주, 막걸리 외에도 다양한 술을 원합니다. 해가 뜨나 바람이 뜨나 소주만 마시는 ‘소주파’가 있기는 하지만, 술꾼은 물론 사회적 지위를 지닌 부유층은 고급주를 원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양담배와 더불어 양주에 대한 단속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과 달리 그 시절은 ‘외화벌이’, 그리고 ‘외화획득’이라는 말로 수입산을 규제하던 시절입니다. 해외여행도 제재하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훔친 사과가 맛이 있는 것처럼, 정부가 규제하기에 양주에 대한 선호도는 뜨거웠습니다.
결국 이국적인, 게다가 소주보다 비싼, 보드카는 그 시절의 주당들에게 엄청나게 먹어주던 술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혼합주, 즉 기타제재주에 불과한 ‘배리나인골드’ 등의 위스키도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위스키, 꼬냑, 보드카 등을 총칭하여 ‘양주’라 불리면서 뭉뚱그려서 고가로 팔렸다는 점입니다. 보드카도 양주의 하나로 불린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니까 반공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공산국가’가 원조인 보드카도 무리가 없이 팔린 이유입니다. 당연히 보드카를 마시는 사람은 ‘뽀다구’를 내면서 마셨습니다. 술이라는 것 자체가 ‘분위기’를 타는 술인데, 양주를 마신다는 분위기 내기에 보드카가 크게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제 그 시절에 ‘양주’라는 타이틀로 비싸게 팔렸던 보드카는 수입주류 중에서 대중주로 그 지위가 격하되었고, 가격도 원액 위스키 등과 비교하면 ‘착한’ 수준입니다. ‘원위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추세는 보드카가 칵테일이나 하이볼의 재료로도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앱솔루트 등 보드카 시장은 새롭게 열리고 있습니다. 다만, 전 세계적인 절주의 분위기에 보드카 열풍은 주춤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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