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를 중심으로 예습과 복습을 충실히 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맞힐 수 있는 평이한 문제를 출제했기에, 수험생들의 득점수준은 예년과 유사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1980년대에 실시된 학력고사가 끝나면, 중앙교육평가원(후일 국립교육평가원으로 개명)의 원장이 TV에 출연하여 상투적으로 했던 말입니다. 매년 같은 말을 반복해서 수험생과 학부모들로부터 엄청난 항의를 받곤 했으며, 나중에는 아예 멘트를 바꿨습니다. 수험생들의 학습정도 자체가 매년 같을 수가 없으며, 각 과목의 난이도를 통일적으로 유지하여 전체 시험의 난이도를 동일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임에도 태연하게 예년의 득점수준과 유사하게 난이도를 조절했다고 장담하는 것은 바람직한 풍경은 아니었습니다.
수학이나 영어와 같은 도구과목은 물론 과학 영역은 교과서만 보면 저조한 점수에 그칠 정도로 그 시절의 학력고사는 결코 난이도가 수월하지는 않았습니다. 교과서로만 공부해서 득점을 올릴 수 있는 것은 주로 암기과목에 한정된 이야기였습니다. 아무튼 영어와 수학이 아닌 국어를 비롯하여 그 시절의 암기과목을 실은 초, 중, 고는 교과서 중심으로 수업을 했습니다. 실은 그 시절의 교사들은 교과서의 내용이 진리인 양 다른 해석을 금지하였고 실제로도 교과서의 내용을 풀이한 교사용 지침서 그대로 가르쳤습니다. 20세기판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면 과장이겠지만, 학생들이 자유롭게 교과서와 다른 해석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예술과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과서의 설명이 진리인 양 교과서의 해석과 다른 해석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1970년대 ‘국민’학교 5학년 국어 교과서에서는 ‘밀레의 저녁 종’이 소개되었습니다. 그 시절에도 ‘저녁 종’은 일상에서는 ‘만종(晩鐘)’으로 부르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국민’학교의 교과서이다보니 ‘저녁 종’이라 표기를 했습니다. 한자식 표현 ‘만종’보다는 ‘저녁 종’이 더 정감이 있기는 했지만, 어른들의 세계에서 쓰이는 말을 어린이용 교과서를 넘어서 일상에서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밀레가 워낙 유명한 화가인지라 그가 그린 다른 그림 ‘이삭 줍는 여인들’과 함께 중, 고교 미술 교과서에서 그림으로도 많이 소개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밀레라는 프랑스 화가는 이역만리 한국의 국어 교과서는 물론 미술 교과서에서도 소개가 되는 대단한 화가로 인지가 되었습니다.
다음 국어 교과서는 밀레의 ‘저녁 종’은 들판에서 젊은 프랑스 부부가 저녁 무렵에 프랑스 농촌을 배경으로 들판에서 기도를 올리는 목가적인 풍경을 그린 것으로 서술하였고, 이를 그대로 믿은 대다수의 학생들도 그렇게 한 가지의 시각으로만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술작품이란 작가의 손을 떠나면 감상하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이 가능합니다. 입시생활을 끝낸 이후 대학생 시절에 본 ‘저녁 종’의 해석은 여러 가지 이설이 많았습니다. 가령, 부부가 죽은 아이를 장례를 지낸다거나, 가난한 소작농 부부가 지주의 횡포에 슬퍼하는 기도를 올린다거나 하는 것들이 그런 실례였습니다.
밀레의 또다른 작품 ‘이삭 줍는 여인들’을 보면, 밀레의 정확한 시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프랑스 농촌에서 이삭을 줍는 목가적인 풍경으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이삭 줍는 사람들’을 해석하는 TV를 보다가, 여태까지 밀레를, 그리고 ‘이삭 줍는 여인들’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삭 줍는 여인들’의 구도는, 강조하여 진하게 그린 앞부분의 세 여인과 뒷부분의 흐릿하게 그려진 밀짚단을 실은 수레와 밀을 수확하는 다수의 지주의 소작농, 그리고 말을 타고 이들을 감시하는 감시원과 멀리 보이는 지주들의 저택이라는 이원적이고 대조적인 구도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한 부분’은, 즉 이삭을 줍는 여인은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진하게, 묘사하면서 이들과 대조적인 지위의 인물군상들은 흐릿하게 처리하면서, 즉 대조적인 구도를 통하여 토지의 소유에 따른 불평등이 자리잡고 있음을 고발하는 자연주의의 전형적인 묘사임을 이해하였습니다.
위고의 ‘레 미제라블’, 그리고 톨스토이의 ‘부활’,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선물’, 그리고 스탕달의 ‘적과 흑’ 등 당시의 문학작품은 일관되게 부의 불평등을 고발하였습니다. 굳이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이 제국주의로 향하는 유럽제국도 자국 내에서는 불평등이 일상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했어도 일상생활의 구조적 불평등 자체는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음을 추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밀레는 본인 스스로 가난한 농부 출신이었지만, 사회혁명이나 계급투쟁을 목표로 정치활동을 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가난한 농촌에서 사는 가난한 농부를 현실에 충실하게 그린 것이었습니다, 자연주의를 넘어 사회주의 화가로 이해하는 것은 의문이 있습니다.
21세기 사회보장제도의 목표는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입니다. 밀레의 후예 ‘시위의 나라’ 프랑스에는 오늘도 연금과 근로시간, 그리고 사회보장제도의 확대를 요구하면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밀레가 고발한 고단한 현실은 선진국이라 불리는 프랑스에서도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자유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보트태권브이의 꿈> (0) | 2025.01.06 |
---|---|
<EU영내의 이민정책과 반이민정책> (3) | 2025.01.05 |
<프랑스산 와인의 감소를 음미하며> (3) | 2025.01.01 |
<연필과 볼펜 사이에서> (1) | 2024.12.31 |
공유물의 ‘변경’의 의미와 요건 등 (0) | 2024.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