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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연필과 볼펜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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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은 아련함과 조바심, 그리고 첫정과 안타까움을 담뿍 담은 추억입니다. 코흘리개 국민학생은 입학을 하면서 연필, 필통, 그리고 공책과 교과서에 첫정을 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입학부터 하얀 공책 위에 머나먼 꿈과 미래를 가득 채우고 싶었지만, 야속하게도 선생님이 호루라기로 구령을 부르면서 삑삑!’, 하면 셋넷!’만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금방 싫증이 나는 둥근 해가 떴습니다.’를 불러야 했고, ‘앞으로 나란히!’를 해야 했습니다. 얼른 교실에 가서 누님들처럼, 하얀 공책 위에 글씨를 가득 담고 싶었는데, 시간은 느려터져서 도무지 앞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것이 인생의 비정한 법칙입니다. 연필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쓰고 싶었고 만화영화의 어여쁜 공주를 그리고 싶었지만, 눈앞에는 삐뚤빼뚤한 못생긴 글자만이 가득했습니다. 남들은 글자가 아닌 활자를 그려내는 것 같은데, 내가 써내려간 글자는 미움이 그득한 괴물덩어리였습니다. 받아쓰기를 할 때마다, ‘좀 더 깨끗이!’라는 글자와 토끼가 새겨진 스탬프를 받으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습니다. 엄마에게 왜 나는 글씨가 안 이쁘냐, 고 엉엉 울면서 하소연을 해봤어도 못생긴 글자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습니다. 못생긴 글자는 팔자거니 하면서 꾹 눌러참다보니 세월은 빛처럼 흘러갔습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니 볼펜이 반겼습니다. 머리가 굵어져서였는지 아니면 인생의 신산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연필을 마주할 때만큼 설레는 마음은 이미 저 멀리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왜 볼펜을 중학생이 돼서야 쓰게 했는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볼펜으로 만난 세상은 마냥 무지개만이 놓여있고 그 무지개가 나만을 반기는 세상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입시의 중압감이 다가왔고, 공부의 압박은 낫지 않는 두통처럼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볼펜의 무게는 곧 공부의 무게였습니다. 다정한 친구들은 곧 경쟁자라는 사실도 볼펜에 담겨 있었습니다. 볼펜을 쥐어야 막연한 압박감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습니다.

 

학창시절을 함께 한 볼펜은 인생에서는 생활의 동반자이자 밥벌이라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뇌수의 분실을 기록하는 저장장치로 쓰이기도 했고, 채권과 채무를 기록하면서 찌질한 인생을 고백하는 흉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달콤한 데이트데이를 기록하기도 했으며, 처량한 군입대를 예고하기도 했습니다. 수험과 취업 등 인생의 거친 항로를 나설 때마다 볼펜은 손에 쥐어져 있었습니다. 컴퓨터의 정확한 기록이 볼펜을 대체하면서 잉여물로 전이하는 듯한 볼펜의 쓰임새를 무시하는 나 자신에게 가해지는 꼰대라는 주위의 손가락질을 당당히 맞서는 묘한 그림은 역설적으로 세월의 흐름을 반추하게 됩니다.

 

지금 눈앞에는 연필과 볼펜 각각 한 자루가 놓여있습니다. 유심히 바라보노라니, 연필과 볼펜은 생명체로 변신하여 내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추억을 그리더니 이내 아픔과 설움을 그려냅니다. 그리고는 차갑게 돌변하여 각종 고지서를 그려냅니다. 카오스 속의 코스모스처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번갈아 그려냅니다. 정녕 연필과 볼펜은 인생의 동반자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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