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게시판

<동명(同名)의 비애>

728x90
반응형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삼수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김소월의 ‘산(山)’이라는 시의 맨 끝부분입니다. 삼수갑산은 위 시에서 험지의 대명사처럼 쓰였지만, 함경도 ‘삼수’와 ‘갑산’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삼수와 갑산은 조선시대부터 위리안치(圍籬安置)하는 유배지의 대명사이기도 했습니다. 그 유명한 고산 윤선도가 유배된 지역이 갑산입니다. 삼수와 갑산도 사람이 사는 곳인데, 삼수갑산이 험지의 대명사로 쓰이면서 주민들은 마치 유배를 당한 죄인처럼 취급을 받아서 무한한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남북이 분단되어서 삼수갑산은 일상에서 멀어지고(?) 대신에 인제와 원통이 각광(?)을 받았습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말장난이 인제와 원통의 주민들을 서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삼천포 주민에 비하면 조족지혈입니다. 삼천포 주민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속담이 생겼습니다. 삼천포에 살면 무슨 중죄라도 짓는 것인지 이 속담은 삼천포 주민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진정 지명으로 주민이 겪는 고통은 동명(同名)에 있습니다. 부산의 대변항은 멸치잡이로 유서깊은 항구임에도 동명의 대변(大便) 때문에, 주민들은 혼동과 당혹을 겪었습니다. 대변항을 끼고 있는 대변초등학교는 수치심과 당혹함의 대명사로 등극(!)했습니다. 마침내 ‘대변초등학교’는 학생과 학부모의 눈물겨운 탄원으로 ‘용암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이리’는 ‘익산’으로, 그리고 ‘구정중·고’는 ‘압구정중·고’로 각각 변경되었습니다. 

동명으로 인한 고통은 동포로부터도 받았습니다. 오래전부터 관악산의 지산(枝山)으로 유명한 삼성산(三聖山)은 이름부터 단군신화의 냄새가 물씬 납니다. 당연히 삼성(三聖)고등학교 등 학교명도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물론 강남구 삼성동(三成洞)보다 훨씬 오래된 산명입니다. 그런데 과거 관악구에 봉천동과 신림동이 무려 11개씩이나 가지번호가 붙은 동명이 있어서 혼동이 빈발하자, 개별적으로 동명을 부여하는 차원에서, 관악구는 그중의 둘을 각각 삼성산을 따서 삼성동(三聖洞), 그리고 신림사거리에 소재한 것을 따서 신사동((新士洞)으로 각각 명명하였습니다. 관악구와 비교할 수 없는 대한민국 부촌의 상징인 강남구가 발끈했습니다. 삼성동(三成洞)과 신사동(新沙洞)을 각각 도용한 것이라 주장하며 행정소송까지 벌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물론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지명은 산과, 바다, 들, 강 등 자연에서 유래합니다. 한자문화권인 한국의 특성상 한글표기가 같다고 동일하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강남구가 행정소송에서 패소한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한자문화권인 까닭에 한, 중, 일은 한자로는 동명이 많습니다. 한국의 봉천은 중국에도 있습니다. 강남은 본래 중국의 양자강 이남을 지칭하던 말입니다. 조선시대까지 각종 문헌에서의 ‘강남’은 중국의 강남을 의미했습니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말에서 강남도 당연히 중국의 강남을 말합니다. ‘천안(天安)’은 천하를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정치적인 냄새가 물씬 납니다. 그렇습니다. 천안의 유래는 북위의 연호(年號)였습니다. 중국의 천안문은 자금성에서 거주하는 천자가 천하를 태평스럽게 다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의 천안은 슬프지만, 중국의 지명을 슬쩍 베껴온 것이 맞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에도 대전이 있고 일본에도 대전(大田, おおた(오오타))이 있습니다. 타국은 물론 내국에서도 전국적으로 동명의 남산은 수십 개가 존재합니다. 미국은 워싱턴 주가 있고, 워싱턴 DC가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동일한 지명이 꽤나 많습니다. 

그러나 동명으로 인한 혼동은 동명이 민망한 부위를 지칭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민망함에는 비길 바가 아닙니다. 충남 금산에 소재하는 자지산(紫芝山)은 등산과 산책, 그리고 휴식공간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금산은 물론 대전의 주민이 다수 자지산을 방문합니다. 가는 길에 출렁다리도 있고, 적벽강에서 매운탕도 맛볼 수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명소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글발음입니다. 남자의 성기가 적나라하게 발음되기에 이성 간에는 물론 동성 간에도 부르기가 민망합니다. 그래서 산명의 개명을 희망하는 민원까지 생겼습니다. 유서깊은 산명임에도 민망한 발음으로 고초를 겪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지산은 약과에 불과합니다. 진정 민망함의 끝판왕은 고려시대 척준경의 영혼의 파트너 왕자지(王字之) 장군을 뺄 수 없습니다. 왕자지는 고려사에도 등재될 정도로 유능한 장군이었습니다. 21세기 현재에도 평범한 시민은 역사책은 고사하고 신문에 실리는 경우도 드물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통사서에 등장한 왕자지가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고려는 물론 단군 이래 무력의 끝판왕인 척준경의 부장(副將)으로 전공도 많습니다. 유능한 장수이기에, 척준경이 목숨을 걸고 왕자지를 구하려 출병하는 감명깊은 장면도 연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자지는 그 이름 때문에(!) 졸지에 투명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척준경은 분명 그 무공을 생각하면, 영화, 드라마는 물론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법하지만, 그 척준경이 사랑한 왕자지가 발목을 잡은 셈입니다.     


역사 교과서에는 윤관, 척준경만 간략하게 나오는 탓에 일반인들이 거의 모르지만 왕자지뿐 아니라 여진 정벌에 참가한 장군들 거의 대부분은 그렇다. 오히려 이름 때문에 유명해진 케이스. 하필 성씨까지 "왕"이어서 참으로 절묘한 어감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소드마스터(sword master)인 척준경의 생애가 드라마화되지 않는 이유로 그의 절친이었던 이 분의 이름을 드는 사람이 있다. 일례로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이 시대를 다룰 때도 차마 이름을 부를 수 없어 패널들은 왕 장군이라고 애둘러 언급하고 이름은 자막으로만 나왔다.
-‘왕자지’에 대한 나무위키의 설명 중에서-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