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전에는 전형계약으로 고용계약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용계약은 노동력과 임금의 등가교환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어느 나라이든 보편적인 방식입니다. 민법전의 고용계약은 로마법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도 고공(雇工)이라는 이름의 임노동자가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고용의 변화에 따른 문제는 각국에 공통적이라고 봐도 크게 무리는 아닙니다. ‘아웃소싱’ 또는 ‘외주화’라는 이름의 간접고용은 모두 고용의 경직성과 호봉제라는 점에서 발생하는 사용자의 부담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고용의 경직성을 회피하려는 유연성, 그리고 연공제에 따른 인건비 절감이라는 방향으로 간접고용제도가 형성 및 발전되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기 마련이고, 웃는 자가 있으면 우는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용자의 간접고용확대는 근로자에게는 고용의 불안, 그리고 저임금 구조의 고착화라는 부메랑으로 다가옵니다. 의회는 약자보호라는 취지에서 간접고용제도를 규율하는 실정법을 도입하게 됩니다. 이러한 각국의 움직임은 데칼코마니처럼 유사합니다. 고용 자체가 대동소이하기에 그 해결책과 대응책의 변증법적 전개도 유사합니다. 간접고용의 대표적 형태로 근로자파견관계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사용자는 파견관계를 계속하려는 속성이 있기에, 국회는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근로자파견법)’을 제정하여 파견근로의 남용을 규제하였습니다. 근로자파견법의 규제의 대표적인 것은 2년이라는 파견기간의 제한입니다.
○법령상의 규제라는 ‘장군’이 있으면 현실에서의 회피라는 ‘멍군’이 발생합니다. 파견근로와 그 기간을 규제하자 변칙적인 사내도급이라는 것으로 근로자파견법을 회피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의 사내도급은 대부분 위장도급, 즉 불법파견인 경우였습니다. 대법원(대법원 2003. 9. 23. 선고 2003두3420 판결)은 무늬만 도급인 불법파견에 대하여도 근로자파견법을 적용하였습니다. 파견근로자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통하여 구제를 받았고, 근로형태의 차이에 따른 손해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이라는 청구의 병합으로 구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대법원 판결(대법원 2024. 11. 20. 선고 2024다269143 판결)은 새로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근로자파견관계가 인정되는 근로자라도 영구무한적으로 장기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대법원은 여기에서 소멸시효와는 다른 차원에서 권리를 소멸시키는 실효의 원칙에 대한 법리를 전개하였습니다. 그런데 선결적으로 이해하여야 할 대목은 권리 본위의 현행 법체계에서는 ‘실효의 원칙’이란 극히 제한적으로만 인정된다는 점입니다. 아무튼 위 대법원의 사례에서 원고는 사내협력업체 소속으로서 엔진제작공정 업무를 담당한 파견근로자(불법파견)이고, 피고는 사용사업주로서, 원고는 피고에게 직접고용간주 효과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하면서, 피고를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및 미지급 임금의 지급을 청구하였습니다.
○원심은 실효의 원칙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논거를 제시하면서 원심을 파기·환송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대법원은 ➀ 원고가 직접고용이 간주된 2002. 4. 22.로부터는 약 18년, 파견근로관계가 종료된 2009. 9. 26.부터는 약 11년 4개월 뒤인 2021. 1. 24.에 이르러서야 이 사건 소를 제기한 점, ➁ 그 사이에 원고가 피고의 다른 협력업체를 통하여 파견근로관계를 유지하였다거나 이 사건 소제기 이전에 피고를 상대로 직접고용이행을 요구하는 등의 권리를 행사하였다고 볼만한 다른 사정이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원고는 피고의 자동차 제조와는 무관한 직종에서 근무한 점, ➂ 피고의 울산공장 내 협력업체 직원들에 대한 근로자파견관계를 인정하는 대법원판결(2008두4367)이 2010. 7. 22. 최초로 선고되었고, 이후 대규모 소송이 제기되었으며, 피고의 아산공장 사내협력업체 근로자들에 대하여 근로자파견관계를 인정한 대법원판결(2010다106436)이 2015. 2. 26. 선고되었는데도, 원고는 그로부터도 약 6년이 지나서야 이 사건 소를 제기한 점, ➃ 원고는 피고와의 근로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이후부터는 약 11년 4개월, 피고의 울산공장 내 협력업체 직원들에 대한 근로자파견관계를 인정한 대법원판결이 선고된 날부터도 약 10년 6개월이 경과한 상태에서 이 사건 소를 제기하였는데, 이러한 경우에까지 실효의 원칙을 부정한다면, 10년의 소멸시효기간이 적용되는 직접고용 의사표시 청구권과의 형평에도 어긋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소멸시효기간 10년입니다. 소멸시효와 그 기간은 강행규정인데, 실효의 원칙을 그 이상의 기간에 대하여 인정한다면 10년이라는 소멸시효기간의 취지가 사실상 배제된다는 묵직한 논거가 주목됩니다. 아무튼 불법파견이라 하더라도 사실상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고 볼만한 사정이 존재한다면, 실효의 원칙을 배제할 이유는 없습니다.
<대법원 판례> 실권 또는 실효의 법리는 신의성실의 원칙에서 파생한 법원칙으로서, 본래 권리행사의 기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권리자가 장기간에 걸쳐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무자인 상대방이 이미 그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 것으로 믿을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게 됨으로써 새삼스럽게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되는 결과가 될 때 권리행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대법원 1988. 4. 27. 선고 87누915 판결, 대법원 2021. 12. 30. 선고 2018다241458 판결 등 참조). 실효의 원칙이 적용되기 위하여 필요한 요건으로서의 실효기간(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한 기간)의 길이와 의무자인 상대방이 권리가 행사되지 아니하리라고 신뢰할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우마다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한 기간의 장단과 함께 권리자 측과 상대방 측 쌍방의 사정 및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정 등을 모두 고려하여 사회통념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1992. 1. 21. 선고 91다30118 판결, 대법원 2023. 4. 13. 선고 2021다310484 판결 등 참조). (대법원 2024. 11. 20. 선고 2024다269143 판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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