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사망 직전에 자신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돌아보는 인생 중에서 기쁜 순간은 물론 슬픈 순간도 아울러 기억하기 마련이지만, 슬프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슬픈 순간을 더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인생에서 좌절과 회한, 그리고 분노를 느낀 순간이 더 절절하게 기억의 잔상에 남습니다. 인생뿐만이 아닙니다. 드라마, 영화, 소설, 그리고 하다못해 만화라도 슬픈 작품이 확실히 또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저도 어려서 본 이두호 화백의 ‘무지개행진곡’이 아직까지 기억에 또렷합니다. 7남매가 실종된 부모를 그리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만화인데, 그 슬픈 장면 하나 하나가 인상에 또렷합니다.
○이 만화에 너무나 몰입한 나머지 이두호 화백이 왜 이렇게 슬픈 만화를 그렸나, 하고 슬픔에 복받쳤고 나중에는 밉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만화에서 아주 인상이 깊었던 소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어린 시절의 저에게 무척이나 어려웠던 단어인 ‘차용증서’라는 것입니다. 주인공들인 7남매의 부모님이 채권의 증거방법으로 받아 둔 ‘차용증서’를 분실한 7남매들이 아파하는 장면이 너무나 인상 깊었기에, 도대체 차용증서가 뭐길래 했던 진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7남매들은 ‘차용증서’가 있으면 당장이라도 돈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차용증서’의 극중 분실이 그렇게나 아팠습니다.
○그 시절에는 전산기록이라는 객관적이고도 증명력이 높은 증거가 없기에, 자필로 작성한 차용증서라는 사문서가 유력한 증거였습니다. 차용증서는 사문서이기에 위조여부, 즉 증서 자체의 진부여부와 내용의 진위여부가 송사에서 언제나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무지개행진곡’에서 등장한 차용증서가 소송이라는 현실에서 다시금 문제가 되는 것은 소멸시효라는 복병입니다. 7남매가 분실한 차용증서는 결국 채권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방법인데, 채권이란 마르고 닳도록 존재하는 재산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민법은 채권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10년만 존재함을 천명하고 있습니다(민법 제162조 제1항). 그런데 채권 중에서 임금채권은 그 존속기간이 3년으로 단축되어 있습니다(근로기준법 제49조). 다만, 이 만화의 사연이 법정에서 다투어지면 실제로는 실종선고(민법 제27조)와 미성년자의 소멸시효정지(민법 제179조)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10년이니 3년이니 하는 소멸시효의 기산점, 즉 출발시간이 언제부터인가가 소송실무에서 자주 다투어지는 쟁점입니다. 기산점 해석의 단초는 역시 법문입니다. 근로기준법 제49조는 물론 민법 제162조는 모두 ‘행사하지 아니하면’으로 법문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 법문은 권리의 행사가능성, 즉 행사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대법원도 당연히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제 근로기준법상의 연차휴가청구권과 연차수당청구권으로 눈을 돌려봅니다. 근로기준법상의 연차휴가는 근로자가 청구하여야 비로소 현실화합니다. 그리고 연차수당청구권은 연차휴가의 불실시가 확정된 다음 날 확정적으로 발생합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연차휴가는 죽어서 연차수당청구권을 남깁니다.
○연차휴가는 유급휴가로서 임금과 등가교환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대법원은 연차휴가의 변형물인 연차수당의 성질을 일찍부터 임금으로 보았습니다. 대법원(대법원 2023. 11. 16. 선고 2022다231403(본소), 2022다231410(반소))은 ‘근로기준법 제60조에 정한 연차유급휴가권을 취득한 근로자가 그 휴가권이 발생한 때부터 1년 이내에 연차유급휴가를 사용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발생하는 연차휴가미사용수당도 그 성질이 임금(대법원 2013. 12. 26. 선고 2011다4629 판결 등 참조)’이라는 기존의 논리를 토대로, ‘같은 법 제49조의 규정에 따라 연차휴가미사용수당 청구권에는 3년의 소멸시효가 적용되고, 그 기산점은 연차유급휴가권을 취득한 날부터 1년의 경과로 그 휴가의 불실시가 확정된 다음 날이다.’라고 연차휴가미사용수당 청구권(흔히 말하는 연차수당의 정식명칭)의 기산점을 판시했습니다. 연차휴가와 연차수당은 등가물이라는 점, 그리고 연차수당은 연차휴가의 변형물이라는 점을 인식하면 이 대법원 판례는 당연한 결론입니다.
<근로기준법> 제49조(임금의 시효) 이 법에 따른 임금채권은 3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시효로 소멸한다. <민법> 제162조(채권, 재산권의 소멸시효) ①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 ②채권 및 소유권 이외의 재산권은 20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 제179조(제한능력자의 시효정지) 소멸시효의 기간만료 전 6개월 내에 제한능력자에게 법정대리인이 없는 경우에는 그가 능력자가 되거나 법정대리인이 취임한 때부터 6개월 내에는 시효가 완성되지 아니한다. 제27조(실종의 선고) ①부재자의 생사가 5년간 분명하지 아니한 때에는 법원은 이해관계인이나 검사의 청구에 의하여 실종선고를 하여야 한다. ②전지에 임한 자, 침몰한 선박 중에 있던 자, 추락한 항공기 중에 있던 자 기타 사망의 원인이 될 위난을 당한 자의 생사가 전쟁종지후 또는 선박의 침몰, 항공기의 추락 기타 위난이 종료한 후 1년간 분명하지 아니한 때에도 제1항과 같다. <대법원 판례> 근로기준법 제60조에 정한 연차유급휴가권을 취득한 근로자가 그 휴가권이 발생한 때부터 1년 이내에 연차유급휴가를 사용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발생하는 연차휴가미사용수당도 그 성질이 임금이므로(대법원 2013. 12. 26. 선고 2011다4629 판결 등 참조), 같은 법 제49조의 규정에 따라 연차휴가미사용수당 청구권에는 3년의 소멸시효가 적용되고, 그 기산점은 연차유급휴가권을 취득한 날부터 1년의 경과로 그 휴가의 불실시가 확정된 다음 날이다(대법원 1995. 6. 29. 선고 94다18553 판결, 대법원 2013. 4. 11. 선고 2012다105505 판결 등 참조). (대법원 2023. 11. 16. 선고 2022다231403(본소), 2022다231410(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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