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가요계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외국에서 한국가요를 표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그 이전에는 한국은 표절공화국이었습니다. 드라마부터, 영화, 가요, 각종 TV프로그램, 도서, 그림, 거기에 법률과 판결문까지 한국은 외국문물의 표절공화국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모방과 표절은 창작으로 가기 위한 성장통입니다.
1990년에도 물론 한국가요는 표절활동이 존재했지만, 질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시기였습니다. 과거에는 트로트 일변도의 가요였지만, 작곡, 편곡, 나아가 연주에서 질적인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IT강국답게 전자음향이 성장하였고, 클래식 악기나 소규모 오케스트라반주 등 고급스러운 진전도 있었습니다. ‘밤무대스러운’ 80년대 반주를 탈피한 멋진 하모니가 등장하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한국을 무시하던 외국에서 한국가요를 표절하는 즐거운(!) 해프닝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1990년대의 변화 중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가사의 질적 성장입니다. 과거에는 유치찬란하거나 과장이 섞인 가사가 많았습니다. 또한 비현실적인 내용으로 혹세무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랑으로 뽕을 뽑은 것은 남인수 이래 한국가요의 불변의 흐름이기는 했지만, 과거에는 사랑지상주의의 경향이 농후했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지거나 아예 현실과 무관하게 당신이 없으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사랑을 과장하고 사랑이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것처럼 포장을 하는 내용이 수두룩했습니다. ‘해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달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당신 없이는 견딜 수 없네(김민식, ‘아름다운 사람’)’, ‘천년을 두고 태워도 끝이 없을 우리 사랑(홍민, ‘결혼기념일의 노래’)’ 등 과장이 흔했습니다.
사랑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인생에서 남녀 간의 사랑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사랑 자체에 시큰둥한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불꽃같은 사랑을 태우다가도 싸늘하게 식어서 이혼으로 가는 경우도 많고, 그냥 뜨뜻미지근하게 좋아하다가 그냥 썸을 타는 수준에서 정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연애 따로 결혼 따로’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사람 사는 곳은 언제나 만고불변의 가치만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남들이 좋아도 나는 싫을 수가 있는 것이 세상사입니다.
1990년대 이후의 사랑코드는 ‘솔직함’이 대두되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015b는 가사에서 현대인의 사랑에 대한 철학을 엄청나게 솔직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 ‘신 인류의 사랑’ 등에서 보인 1990년대 청춘들의 사랑표현은 직설적이고 솔직하다는 것으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수필과 자동차’는 낙엽만 봐도 가슴이 아픈 소녀감성이 숙녀로 변하면서 속물로 변하는 상황을 경쾌하면서도 날카롭게 풍자를 했습니다. 사랑이란 현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주고받는 존재, 나아가 이해타산적인 속성이 존재함을 냉철하게 지적을 했습니다.
영화를 보곤 가난한 연인 사랑얘기에 눈물 흘리고순정 만화의 주인공처럼 되고파 할 때도 있었지.이젠 그 사람의 자동차가 무엇인지 더 궁금하고어느 곳에 사는지 더 중요하게 여기네.우리가 이젠 없는 건 옛친구만은 아닐꺼야.더 큰 것을 바래도 많은 꿈마저 잊고 살지우리가 이제 잃은 건 작은 것만은 아닐 거야.세월이 흘러갈수록 소중한 것을 잊고 살잖아.
https://www.youtube.com/watch?v=gfk2mS2MUzU
‘왜 돌아보오’라는 윤복희의 히트곡에서는 ‘사랑한단 말을 마오. 유행가 가산줄 아오.’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랑을 유행가 가사처럼 쉽게 말을 하지 말라는 나름 교훈이 담긴 것이지만, 결국은 사랑지상주의에 속한 영역입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사랑 자체가 돈과 전혀 무관하지 않게 흐르는 인간사의 속성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습니다. 015b는 실험적인 곡으로 유명했지만, 현대인의 인스탄트같고 타산적인 사랑에 대한 인간철학을 담고 있어서 1990년대를 대표하는 그룹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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