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에 본 만화 중에서 차용증이라는 것이 등장하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한국만화계의 거물인 이두호 화백의 ‘날고 싶은 물새들’이라는 작품으로 ‘소년중앙’에 연재되던 만화였습니다. 돈을 빌려 가고도 쌩까는 사악한 사람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으로 소박한 시민들 사이에서 행해졌던 일종의 예방장치인 차용증을 만화의 소재로 등장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온라인으로 자금이체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차용증보다 명확한 증거로 활용됩니다. 법원에서도 은행의 전산이체를 당연히 높은 증명력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은행의 전산이체 내역은 돈이 오간 사실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 그 돈의 성격 자체를 확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소박한 시민들은 거기에 더하여 위의 차용증과 같은 서면을 작성하는 관행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의 전산이체 내역과 차용증을 더하면 갑이 을에게 금전을 차용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차용증의 기능을 넘어선 각종 각서가 활용됩니다. 사용자와 근로자 간에도 당연히 활용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퇴직금이나 임금 등을 수령하고 난 후에 각종 민·형사상 이의제기를 포기하는 내용이 담긴 각서입니다.
○간혹 악덕 근로자 중에서 이러한 각서가 없음을 기화로 고용노동청이나 법원에 체불된 임금이나 퇴직금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용자로서는 억울하고 미칠 지경이지만, 제3자인 법원이나 고용노동청의 근로감독관은 사용자의 손을 당연히 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용자의 말이 맞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 잊고 있던 각서를 장롱의 구석에서 발견하면 ‘유레카’하고 소리를 질렀던 아르키메데스의 심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판사는 당연히 이 각서를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각서가 진짜인지(증거능력) 그리고 맞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사실인지(증명력 또는 증거력) 확인을 해야 합니다. 서증의 검증이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대법원은 이 각서가 사실이라면(이 경우에는 대부분 당사자의 날인이나 서명이 등장하기에 날인이나 서명으로 서면의 진부를 가리는 추정과 그 내용의 진위를 추정하는 이른바 ‘이단의 추정’이 등장합니다)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처분문서는 그 진정성립이 인정되면 반증이 없는 이상 그 문서의 기재 내용에 따른 의사표시의 존재 및 내용을 인정하여야 하며, 의사표시의 해석에 있어서 당사자의 진정한 의사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당사자의 내심의 의사가 아니라 외부로 표시된 행위에 의하여 추단된 의사를 가지고 해석하여야 한다(대법원 1997. 11. 28. 선고 97다11133 판결). 이 판결의 의미는 문서가 진짜라면 그 내용도 어지간하면 진짜가 맞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서에 기재된 내용으로 당사자의 진의를 추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판이 벌어지는 상황은 당사자가 다툼이 있는 경우이기에, 대부분은 그 기재내용대로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위의 사례에서 판사는 각서가 진짜라는 것을 확인하면 근로자의 반증이 없는 이상 사용자의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판사는 보통 원고의 청구가 이유없다고 보아 ‘청구기각’이라는 판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제소특약(일부에서는 ‘불제소특약’이 맞다고 하는데, 의문입니다. 또한 형법상 ‘공정증서원본불실기재죄’가 맞고 ‘공정증서부실기재죄’는 틀리다고 하는데. 역시 의문입니다)’의 존재를 이유로 제소가 부적법하다고 보아 ‘각하’판결을 합니다. 원로 법학교수인 호문혁 교수는 본안에 대한 문제로 보아 ‘청구기각’이 맞다는 주장을 합니다.
○부제소특약은 전두환 신군부가 동아방송 등 언론사를 ‘접수’할 때 애용(?)했던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조폭이 나이트클럽 등을 ‘접수’할 때도 애용(?)했습니다. 퇴직금의 수수와 더불어 이용하는 민·형사상 이의제기 등의 포기각서는 곧 부제소특약임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법률적 예방장치는 슬프게도 법률이라는 것은 본래 인간불신을 전제로 춘추전국시대의 법가가 설파한 인간은 본래 악하다는 성악성을 확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통함을 던져줍니다.
<판례1> [1] 처분문서는 그 진정성립이 인정되면 반증이 없는 이상 그 문서의 기재 내용에 따른 의사표시의 존재 및 내용을 인정하여야 하며, 의사표시의 해석에 있어서 당사자의 진정한 의사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당사자의 내심의 의사가 아니라 외부로 표시된 행위에 의하여 추단된 의사를 가지고 해석하여야 한다. [2] 근로자가 회사를 퇴직하고 퇴직금 등을 수령하면서 "회사와의 근로관계를 종료함에 있어 노사합의에 의한 퇴직금, 가산금 및 특별위로금 등 근로 대가 일체를 지급받은바, 근로관계 종료와 관련하여 추후 여하한 이의 제기도 하지 않을 것을 서약합니다."라는 내용의 서약서에 서명한 경우, 그 문언에 표시된 대로 회사와의 근로관계가 종료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든 법률관계 특히 퇴직금, 가산금 및 특별위로금 등 근로 대가와 관련된 일체의 청구권을 포기한 것이거나 향후 이에 관한 민사상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부제소특약을 한 것으로 봄이 합리적인 의사 해석의 방법이고, 소권이 공권이라거나 퇴직금제도 자체가 강행법규의 성질을 띠고 있다고 하여 이러한 특약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근로자가 퇴직금 청구소송을 먼저 제기한 후 서약서에 서명날인하고서도 퇴직금 청구소송을 계속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정은 근로자의 내심의 의사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그와 같은 의사가 외부로 표시된 것이 아닌 이상 의사표시의 해석에 참작할 것도 아니라고 한 사례. (대법원 1997. 11. 28. 선고 97다11133 판결) <판례2> 불제소합의가 있는 경우 그 불제소합의가 포기하거나 처분할 수 없는 권리나 법률관계에 관한 것이었거나 특정, 제한되지 아니한 일반적, 포괄적인 소권의 포기를 내용으로 하여 사회질서에 반하는 경우, 불확정한 기한 또는 불명확한 조건 등을 붙여 법적 안정성을 해치거나 명시적, 문언적이 아닌 묵시적, 추상적인 합의인 경우, 일방 당사자가 우월한 사회적.경제적 지위에 있어 비록 상대방의 궁박, 경솔, 무경험을 이용한 불공정거래에까지는 이르지 아니할지라도 상대방의 상대적 열세를 이용한 합의로서 이를 인용하는 것이 공평과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경우 등에 해당하지 아니한다면, 당사자가 그 불제소약지에 위반하여 제기한 소송은 권리보호의 이익이 없는 것이어서 부적법하다. (서울고등법원 1993. 7. 9. 선고 92나18377 제1민사부판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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