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게시판

<추억의 드라마, ‘걸어서 하늘까지’>

728x90
반응형

007시리즈 중에서 최고를 꼽으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 결과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제각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그런 질문이 던져진다면, 숨도 쉬지 않고 제10탄 ‘나를 사랑한 스파이’를 꼽을 것입니다. 알프스를 배경으로 한 그림같은 스키할강 장면과 자동차가 순식간에 잠수함으로 변하는 장면 딱 두 가지만으로도 역대급의 007시리즈로 꼽기에 충분합니다. 불사신모드로 맹활약하는 죠스의 괴력도 뺄 수 없는 이 시리즈의 묘미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역대 최고의 본드는 단연 로저 무어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반전이라는 구슬픈 현실이 존재합니다. 로저 무어가 등장하면 빠지지 않고 기사를 읽던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로저 무어가 ‘007은 첩보물인데 액션에 치우쳐서는 곤란하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순식간에 로저 무어에 대한 실망이 엄습하였습니다. 007이라는 첩보물에서 본드걸과의 베드신이 등장할 수도 있지만, 화끈한 액션이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물에서도 멜로가 등장할 수 있는 것처럼, 영화문법에서 특정한 장면만이 절대적일 수는 없습니다. 실은 007의 플롯 자체가 정형화된 것은 아니며, 시리즈의 특성마다 약간의 클리셰의 변형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007시리즈의 숨은 묘미입니다. 로저 무어가 아무리 제임스 본드역을 훌륭하게 연기했다고 하더라도 제임스 본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관객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로저 무어의 이런 꼰대스러움에 오래전에 당대의 인기가수이자 원로가수 패티김의 서태지 폄하에 분노가 치밀었던 순간이 오버랩되었습니다. 패티김은 대중가수의 정의를 할 자격이 없습니다. 대중가요는 그 누구도 정의할 수는 없으며, 단지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대중가요는 패티김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대중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두보의 ‘강남봉이구년(江南逢李龜年)’이라는 한시는 당 나라의 대중가수로서 인기를 누렸던 이구년이라는 사람의 노년의 회한을 한시로 적은 시입니다. 그 시절에도 놀랍게도 대중가수가 존재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도 원형극장에서 노래를 부르던 대중가수는 존재했습니다. 패티김이 아무리 뛰어난 가수라 할지라도 대중가요란 이런 것이다, 라고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패티김의 도그마이자 꼰대력입니다.

 

자기가 잘 모르거나 인생후배들의 활동을 이해하려는 의지도 없으면서, 잣대를 나에게 맞추라는 것이 꼰대의 정의입니다. 꼰대는 상대를 무시하고 이해가 결여된 태도입니다. 그리고 ‘다름’을 ‘틀림’으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인생선배가 꼰대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인생후배가 꼰대인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최근의 드라마제작의 패턴은 오히려 후배세대들이 퇴영과 후퇴를 반복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천편일률적인 ‘신데렐라 판타지’ 플롯으로 일관한 최근의 드라마입니다. 무슨 놈의 30 전후의 ‘실장님’이 그렇게나 많아서 가난한 비련의 여주인공에게 목을 메다가 해피엔딩으로 종결이 되는지 요즘 2030의 말처럼 무척이나 ‘짜치는’ 상황입니다.

 

최소한 드라마제작의 다양성에 있어서는 예전 드라마가 훨신 앞섰습니다. 최근에는 서민드라마, 농촌드라마, 그리고 하층민의 삶을 조명하는 드라마가 실종되었습니다. 사극은 진작에 사망선고를 받았습니다. 물론 방송국이 돈이 없다는 이유도 수긍할 수는 있지만, 돈이 안 드는 서민드라마나 농촌드라마의 실종은 유감입니다. 그런 시대이기에, 역설적으로 하층민의 좌절과 분노, 그리고 신분상승의 욕망을 그린 ‘걸어서 하늘까지’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아버지 소매치기, 그리고 아들 소매치기라는 범상치 않은 소재를 두고도 시청자들을 울렸던 그 장면 하나 하나가 새롭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9E_t6Ty41o

 

 

장현철의 멋진 목소리로 작곡가 최경식의 표절시비를 그나마 잊게 만든 짜릿한 상황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주인공 최민수의 인생연기와 여신모드로 열연한 김혜선의 인상적인 모습이 ‘걸어서 하늘까지’의 마력이었습니다. 요즘이라면 세상만사 훈계를 하지 못하면 몸에서 두드러기가 나는 ‘선비정신’ 가득한 ‘프로불편러’들의 불편함 때문에 공중파에서 방영되는 것 자체가 아리송하겠지만, 적어도 그 시절의 시청자들은 다양한 세계를 드라마로 접하고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제작기법은 물론 HDTV에 구현된 선명한 화질, 그리고 입체적 셋트장의 구현 등 과거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는 진화된 상황에서도 다양성의 공간을 담을 없는 ‘신데렐라 판타지’와 같은 소재의 천편일률화는 최근 일련의 드라마가 받을 수밖에 없는 뼈아픈 비판의 불씨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보기 어려운 소재이기에, 딱 30년 전에 방영된 ‘걸어서 하늘까지’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