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감격은 아직도 짜릿합니다. ‘그 날’이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밤을 새서 읽은 날입니다. 신림동 하숙집에서 저녁 먹고 심심풀이로 읽던 ‘사람의 아들’은 읽을수록 마치 마약에 취한 듯 빠져들었습니다. 읽으면서 한국에서 이런 위대한 작가가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누군가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작가가 있냐고 묻는다면, 그때는 물론 지금도 숨도 쉬지 않고 이문열을 꼽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 딱 하나만으로도 이문열은 노벨문학상급 작가로 등극했습니다. 실은 이문열에 그나마 견줄만한 대가는 황석영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 이후 ‘이문열’이라는 이름만 붙으면 닥치는 대로 독파했습니다. 이문열은 하늘이 내린 글재주, 악마의 글재주를 지닌 작가입니다. 그가 쓴 작품은 귀신에 홀린 듯 읽혀졌습니다. 이문열 작품의 강점은 독자에게 무한한 학식을 안겨준다는 망외의 기쁨입니다. ‘금시조’를 읽으면서 당송팔대가의 예술을 자각하게 되었고, 남송과 북송시대의 회화의 맛을 간접적이나마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고 김흥기가 열연한 ‘금시조’의 영상문학을 거듭 감상할 유인을 주었습니다. ‘황제를 위하여’를 읽으면서 이문열의 해박한 동양학을 음미했고, ‘칼레파 타 칼라’를 통하여 고대 그리스의 생생한 현장을 읽었습니다. 이문열의 작품은 그 자체가 치열한 작가정신과 밀도 높은 고전탐구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차츰 이문열의 왕성한 탐구정신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그가 추구한 탐구정신이 언제나 화석화된 과거의 지식에 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당송팔대가니 동기창이니 하는 지식을 써먹거나 활용할 일은 거의 없습니다. 고교에서 씨름을 하던 미적분을 일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쓸 일이 없는 것보다 더 희귀한 일입니다. 이문열의 고급지식은 극소수의 매니아에게만 소구력이 있는 지식입니다. 그러나 그의 결정적 약점은 보수의 가치를 절대화하려는 그의 편협함입니다. 보수주의라 하여 전적으로 과거의 학문이나 지식에 함몰될 필연적인 이유는 없는데, 그는 ‘과거의 것’에만 집착을 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방향성의 제시는 아예 없었습니다. 보수는 보수의 가치를 토대로 새로운 진보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 진정한 가치라는 점을 간과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정치보수’에만 그쳤으며, ‘경제진보’에 대하여는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정치는 극우성향의 공화당, 그리고 중도보수의 ‘민주당’이라는 양당체제로서, 정치에서 진보가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양자 모두 경제에 있어서는 급진적일 정도로 진보적입니다. 실리콘밸리의 기업문법은 ‘혁신기업’입니다. 밤을 새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는 도전정신이 미국이 21세기 IT제국을 이룬 원동력입니다. 비록 정치는 보수적인 것이 대세이지만, 기업의 활동은 진보와 혁신 그 자체인 것이 미국의 현실입니다. 자본주의의 최첨단이 미국입니다. 이문열은 바로 여기에서 막혔습니다. 정치보수가 곧 선이고 그에 반대되는 것은 악이며, 진보정치는 홍위병이기에 배격의 대상이라는 괴상한 신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정치보수가 반드시 경제보수는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 대목입니다.
수출로 먹고 사는 한국에서는 정치소신과 무관하게 기업의 가치는 무한한 도전정신과 시행착오를 각오한 혁신기업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기업가의 도전정신이 사라지면 한국의 미래는 없습니다. 이문열은 정치보수가 보수의 전부인 것으로 오인하고 있었습니다. 정치는 보수라 하더라도 경제는 급진적이어야 합니다. 보수경제만 고수하고 진보경제의 가치를 외면한 유럽경제가 망가진 이유를 곰씹어봐야 합니다. 이문열은 ‘삼국지 평역’을 써서 100억 이상의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정치보수의 훈계를 장황하게 나열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독자는 삼국지 전략게임이나 삼국지 캐릭터를 모티브로 한 IP의 창출을 더 원합니다. 그 이전에 지루하고 짜증나는 종이책 자체를 꺼려합니다. 경제진보의 가치를 이문열은 아예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문열의 보수는 도돌이표에 불과합니다. 새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변화하는 보수의 가치, 고전의 가치가 실종된다면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보수정치를 논하는 사람도 카카오톡과 틱톡을 사용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진보정치를 추구하는 사람도 동반자라는 사실을 외면했습니다. 배격과 혐오의 대상으로만 인식했습니다. 호남평야의 쌀을 영남사람도 먹는다는 사실, 그리고 거제도 멸치를 충청도 사람도 좋아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인간은 보편적인 속성이 우선하고 정치취향은 별개라는 사실을 외면했습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살 권리가 있으며 존재의 가치가 있습니다.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존재하듯이, 정치지향점이 다르더라도 공존이 가능한 것이 사회의 구성원리입니다.
이문열이 몰락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가 진영논리의 선두주자였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습니다. 이문열을 낳게 한 ‘사람의 아들’은 인간구원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물음을 독자에게 던진 화두 때문에, ‘시대의 고전’으로 등극하였습니다. 정치보수를 고수하더라도 ‘사람의 아들’의 문법이라면 당연히 진보정치도 수용하여야 합니다. 이문열의 자가당착이 그를 몰락하게 한 근원적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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