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속박은 묘한 길항작용(拮抗作用)이 있습니다. 자유로운 상태에서는 속박을 그리워하고, 속박에서는 자유를 뜨겁게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우면 앉고 싶고, 앉으면 서고 싶은 사람의 모순적 심리를 이미 2,500년 전에 갈파한 장자의 진단이기도 합니다. 영화 ‘친구’가 그리는 시대적 배경은 1970 ~ 80년대입니다. 그 시절, 딱 요즘과 같은 2월 하순은 봄방학기간이었습니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처럼 공식적인 방학은 아니지만, 졸업과 입학, 그리고 학년 교체기를 접하면서 학습진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기간이기에, 그냥 ‘방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봄방학은 자유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속이 부동적인 상태이기에, 역설적으로 속박이라는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몇 학년 몇 반’이라는 소속감은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부여합니다. 봄방학은 소속이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새로운 소속이 생기기 전까지는 스스로 행동의 준칙을 설정하고 나아가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자유는 책임이라는 잔인한 뒤끝이 있습니다. 자유를 차분하게 인생을 대비하는 도약의 시간으로 활용하는 학생과 자유를 통제하지 못하고 비행청소년으로 추락하는 학생으로 갈리는 시기였습니다. 역설적으로 봄방학이라는 시간은 자유의 공간에서 질서 내지 속박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야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달금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랴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복종’ 중에서>
봄방학은 이렇게 자유와 속박의 진의를 깨닫는 철학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철학은 진학 또는 입학이라는 설렘과 졸업이라는 후련함이 사회에서 동시에 표출되는 봄방학 시기는 아무래도 들뜬 분위기가 사회 곳곳에서 상반된 모습으로 현실화했습니다. 손목시계나 앨범, 그리고 카세트 등 졸업과 입학 선물을 받아 환호하는 학생이 있는 반면에,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졸업식에 난입하는 불량중고생도 언제나 언론에 등장하였습니다. 대다수는 유흥과 휴식을 왕복했습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정중동(靜中動)의 자세로 새로운 사회에 차분하게 대비하는 움직임도 존재했습니다. 적어도 그 시절은 지금보다 입시경쟁이 더 뜨거운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참고서 등 학습교재를 구해서 도서관으로 향하는 중고생과 취업준비 대학생의 물결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봄방학을 ‘알차게’ 보내라는 어른들의 가르침은 실은 공부하라는 훈계였습니다.
그 시절의 공부타령은 이유가 있습니다. 교육당국의 교육정책의 정점은 대입제도에서 존재했으며, 100만명의 대입수험생 중에서 20만명 내외만이 4년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인생의 갈림길인 시대였습니다. 고도성장기이기에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대졸자의 인력수요가 폭발하였고, 거기에 더하여 지금과 같은 IT기기가 폭발하는 시절도 아닌 데다가 대졸자 자체가 적었던 시절이기에, 상대적으로 대졸자의 취업이 쉬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야근과 주말근무가 당연했던 월화수목금금금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까지 시중은행의 창구에서 주산은 흔히 보는 물건일 정도로 기업에서 수작업은 흔한 풍경이었습니다.
봄방학은 분주한 봄의 새학기를 기다리는 침잠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교를 떠난 이들에게는 침잠의 시간이란 아예 없습니다. 언제나 생존의 시간이고 분주한 시간입니다. 봄방학은 어쩌면 학생의 특권을 누리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행복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교실이라는 속박된 공간에서 제한된 자유만이 존재하는 시간이지만, 사람들은 그 교실에서의 시간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간직합니다. 사람들은 자유와 행복의 시간보다는 속박과 고통의 시간을 더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시간 자체도 짧지만 자유와 속박이 교차하는 카오스의 시기이기에, 봄방학의 기억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희미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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