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게시판

<박종팔 애증사>

728x90
반응형

지금은 존재감 자체가 없지만, 70년대는 프로복싱이 국민스포츠인 시절이었다. 각 방송국은 주말이면 골든타임에 프로복싱 프로그램을 배치하였고, 세계타이틀이라도 걸린 시합이면 며칠 전부터 바람을 잡았다. 세계타이틀을 딴 홍수환은 귀국을 해서 광화문에서 카퍼레이드 환영을 받았다. 대통령의 금일봉까지 받았다. 전 국민의 영웅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당시 프로복싱 타이틀은 대부분 경량급이었다. 중량급(中量級)이나, 중량급(重量級) 이상에서 국내프로복서들은 세계 정상급과는 거리가 있었다. 복싱뿐만이 아니라 다른 스포츠에서도 서양인에 비하여 한국인들은 언제나 체격 및 체력에서 열세를 보였다. 체격과 체력의 차이가 스포츠 캐스터의 단골 레파토리였던 시절의 아픔이기도 했다. 류현진, 박찬호나 손흥민처럼 서양인보다 체격과 체력이 떨어지지 않는 시대는 한참 이후였다. 당시에는 중량급 이상은 한국인뿐만이 아니라 동양인에게는 넘사벽의 수준이었다. 서양에서 중간을 의미하는 미들급은 한국에서는 중량급(重量級)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물론 김기수나 유제두의 경우처럼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으나, 그들도 세계타이틀 홀더로 장기간 주류로 군림한 것은 아니었고, 세계프로복싱역사를 보더라도 중량급에서 테크닉이나 체력 등 모든 측면에서 역대급 선수들은 더욱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70년대 말에 탈동양급의 복서 박종팔이 등장했다. ‘박종팔이라는 이름부터 무척이나 억세고 단단한 인상을 풍겼다. 박종팔은 동양의 중량급 복서치고는 스피드, 테크닉, 펀치 등에 있어서 그나마 세계정상급에 근접하였다.

 

그러나 박종팔은 두 가지 고질병이 있었고 선수생활 마감까지 고치지를 못했다. 첫째는 맷집이 약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수비가 허술했다는 것이다. 박종팔은 강펀치가 있는 반면에 유리턱이었다. 동급의 마빈 해글러에게는 전혀 데미지를 입히지 못한 오벨 메히야스의 가벼운 잽으로도 턱이 흔들렸고 다운도 당했다. 그에 더하여 항상 가드를 충실하게 올리지 않았다. 가드를 올리지 않은 허술한 수비는 펀치가 약한 동양의 복서에게는 통할 수 있어도 초강력펀치를 지닌 서양의 복서에게는 그냥 먹이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들급 역사상 최강의 복서인 해글러는 언제나 가드를 정확하게 올리고 수비를 단단하게 했다. 더군다나 해글러는 강철턱이었고, 초강력 맷집을 지녔었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수비를 단단하게 하였다. 불의의 일격에 KO로 질 수 있는 것이 복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해글러와 같은 정상급 복서가 취할 당연한 태도다. 박종팔은 복서의 말년에 백인철과 라이벌 전을 벌였는데, 여기에서도 가드를 느슨하게 내리고 있었다. 박종팔을 보면서 가장 화가 났던 것이 허술한 수비였다.

www.youtube.com/watch?v=QnHO3FSrD_E

박종팔은 동양무대에서는 거의 저승사자급으로 상대방을 캔버스에 눕혔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비록 성사는 되지 않았지만, 토마스 헌즈나 마빈 해글러 등 당대의 정상급 복서와 붙었다면 상성을 고려할 때 이기기 어려웠다. 박종팔의 스피드는 동양권에서만 정상급이었고, 펀치도 동양권에서만 먹어줬다. 무엇보다도 박종팔의 맷집과 스태미나는 아쉽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종팔은 중량급의 간판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박종팔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박종팔을 응원했기 때문이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