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는 국어를 창조하고 학자는 그것을 정리한다.
90이 넘게 왕성하게 국어학 연구에 매진했던 고 김민수 고려대 명예교수의 ‘언어의 창조와 정리’라는 글이 과거 고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김민수 교수는 여기에서 ‘시인은 언어를 창조적으로 파괴하고 학자는 그것을 정리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시인은 기성의 문법에 구애받지 않고 파격적인 언어를 구사하여 언어를 창조한다는 것은 만국공통이기에 굳이 설명의 필요성이 없습니다. 영어에서 ‘poet’라는 단어는 단순하게 시인이라는 의미를 넘어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널리 쓰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입니다.
그런데 대중문화가 시인의 언어예술보다 광범위하게 영향력이 일상화된 현실에서는 가수가 국어를 창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네가’와 ‘니가’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니'는 '네'의 방언이라고 밝히고 있음에도 대중가요에서 ‘니가’가 ‘네가’보다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니가’에 대하여 나무위키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당연히 표준국어대사전보다는 공신력이 떨어지지만, 대중의 평범한 인식은 충분히 반영합니다.
한국어의 2인칭 '네가' 대신 사용하는 구어적 표현. 중부 방언에서 장음 [ㅔː]는 [ㅣː]로 변하는 경우가 많은데, '니ː가'는 항상 장음으로 발음된다. 남한에서 'ㅐ'와 'ㅔ'의 구별이 점점 불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에, 1인칭 '내ː가'와 2인칭 '네ː가'가 잘 구별되지 않아 '네ː가'가 [ㅔː >ㅣː] 변화를 겪은 후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니가'를 쓰지만, 최근 10, 20대를 중심으로 '너가'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고 있다. -나무위키 ‘니가’ 중에서- |
BB는 1990년대 중반에 육감적인 몸매와 서구적인 얼굴로 뜨거운 인기를 누렸던 듀오 가수였습니다. 그들의 대표곡 ‘비련’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너’와 ‘니’가 섞여서 쓰이고 있습니다. 실은 그 이전에도 김건모의 ‘핑계’에서 ‘니’가 사용되면서 전국적으로 보편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니’의 사용은 실은 언중이 ‘네’의 사용을 꺼리면서 발생한 것입니다. ‘네’와 ‘니’가 발음상으로는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를 강타한 조용필의 히트곡 ‘여와 남’에서는 ‘너’라고 불리던 것이 1990년대를 거치면서 ‘니’로 불렸던 연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중가요의 가사의 변화는 당연히 언중의 사용의 변화를 수용한 것입니다. 향후 ‘니’도 표준어로 등극하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 가능합니다.
차마 버릴 수 없어서 깊이 간직해온 너의 사진
나를 보며 웃는 널 이젠 태워야만 하는 나를 용서해
니가 날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니맘 다알아 난 벌 받을 거야
다만 내 앞의 현실을 위해선 다른 길이 없었어.
BB가 왕성하게 활동할 때는 국군장병이 가장 좋아했던 가수로 꼽혔습니다. 혈기왕성한 국군장병이 미모와 몸매가 최고인 미녀가수를 마다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선정적인 춤사위가 더해지고 약간 야시시한 옷차림으로 이들은 섹시미로 남심을 저격했고, 각종 가요무대에서 뜨거운 인기몰이를 했습니다. 이들의 대표 히트곡이 바로 이 ‘비련’입니다. BB라는 이름은 BBQ라는 치킨 브랜드와 유사성 때문에 연상효과를 누리면서 더욱 인기가 높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Mj1Mb0ngyk
그러나 역시 가수는 가수입니다. 후속 히트곡이 없었고, 이들을 둘러싼 잡음이 이어지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이들의 인기도 차츰 시들해졌습니다. 그리고 무심한 시간이 흘러서 이들의 존재감은 지금 시점에 거의 사라졌습니다. 물론 이들의 대표곡 ‘비련’도 추억과 유튜브에서만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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