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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연예한담

<서정주의 ‘푸르른 날’ 그리고 슬픈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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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내가 다니던 대전 대덕고 앞의 대덕슈퍼는 만물백화점이었다. 군것질 거리가 가득한 슈퍼, 온갖 문구가 그득한 문구점, 대덕고 교사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식당, 유학생들의 유숙을 해결하는 하숙집, 엉성하지만 풋풋한 연애공간 등 그 용도가 다양했다.

 

나는 그 중에서 문구점으로 가장 많이 이용을 했다. 볼펜과 공책, 그리고 연습장을 구입할 때는 언제나 대덕슈퍼를 애용했다. 볼펜과 공책은 민씨 영감님이 주는 것으로 아무 불만이 없이 받아들었으나, 연습장은 꼭 표지를 보고 골랐다. 당시 책받침 스타였던, 소피 마르소, 브룩 쉴즈, 피비 케이츠 3인방의 사진이 표지였던 연습장이 친구들에게는 대세였지만, 나는 그런 것들은 너무 흔해서 '서시', '진달래꽃', '님의 침묵' 등의 시와 그림이 있는 연습장을 선호했다.

 

1985년 봄의 기운이 화창한 어느 날, 서정주의 '푸르른 날'과 산뜻한 그림이 곁들여진 연습장을 무심코 집었다.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든다'는 발상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시어가 낭만시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역시 고수의 감각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며칠 후 등교길에서 송창식이 귀에 익은 가사로 된 산뜻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 귀에 확 꽂혔다.노래 자체도 유행가답지 않게 심금을 울리는데, 가사가 왜 이리 데쟈뷔를 떠올리는지...

 

처음 듣는 노래답지않게 자꾸만 그 멜로디도 입가에 맴돌았다. 교실에 와서 가방을 펼치는데, 서정주의 '푸르른 날'의 가사가 확 눈에 펼쳐졌다. 가사와 곡, 노래, 연주 모두 최적의 앙상블이란 바로 이것을 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지금 들어도 '푸르른 날'은 명곡 중의 명곡이다.

 

당시 수학 선생은 '야비한 문제'를 무척이나 성토했다. 그리고 얄팍한 처세술을 무척이나 혐오하여 전광용 작가의 '꺼삐딴 리'라는 소설을 가끔 화두에 올렸다. 바로 이 꺼삐딴 리의 주인공처럼 눈부신 변신을 거듭하여 출세가도를 달린 추악한 인생이 서정주의 흑역사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서정주의 시 자체는 20세기 최고의 시의 반열에 올라 김소월, 한용운과 더불러 2007년 시인들이 꼽은 20세기 최대 시인으로 꼽혔다.

 

그렇다. 고 2시절의 국어 교과서에는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실렸다. 40대가 원숙미를 느낄 수 있다는 당시 참고서의 해설은 이제 50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그리 수용하기 어렵지만, 당시 고교 동기의 심금을 울렸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가 없다. 실은 '국화 옆에서' 자체는 한국의 명시라는 점은 한국인이라면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더 슬프다.

 

https://www.youtube.com/watch?v=mKr5P78Ha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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