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실무에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자문하는 전직 부장판사이자 대학 동기 친구가 있습니다. 대학시절부터 죽이 맞아서 어울렸던 친구인지라, 아무런 이해관계가 걸려있지 않아도 솔직하게 알려주는 것이 인상적인 친구입니다. 그 친구의 말 중에서 인상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법대(法臺)에서 내려다볼 때는 어리석은 듯이 보였던 그 많은 시민들이 변호사를 하면서 만나보니까 구체적인 법리는 잘 몰라도 대부분이 생각보다 똑똑했다는 사실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송사에는 인간이 겪는 갈등과 번뇌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후자는 32년간 법관을 하다가 퇴임한 강민구 전 법원장의 멘트와 완벽하게 일치하기도 합니다.
○송사는 법률상의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법학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지만, 현실에서 시민들이 겪는 송사는 이해관계의 다툼이고, 그 이면에는 갈등과 번뇌가 담겨 있기 마련이라는 전직 법관들의 공통된 진단을 주목해야 합니다. 생존 공간에 던져진 인간은 죽을 때까지 욕망을 충족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존 공간이 갈등과 번뇌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2,500년 전에 석가모니가 깨달은 가르침입니다. 석가모니가 체득한 인간, 그리고 인간세상의 본질이 무려 2,50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면서도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허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단순한 이치가 법률상의 제도를 이해하는 단초이기도 합니다.
○갈등과 번뇌는 스트레스라는 현대어로 대체가 가능합니다. 바로 이 스트레스가 현대인이 겪어야 할 숙명입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모든 인간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말로 변용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근로자만이 겪는 고통이자 권리인 업무상 질병으로서의 정신질환도 출발은 스트레스입니다. 모든 인간이 겪는 스트레스 중에서 직업과 관련이 있는 정신질환만이 산업재해에 해당합니다. 다음 <기사>는 2023년 정신질환으로 인한 산재 신청은 684건으로 4년 전인 2019년 313건보다 2배 이상 늘어난 수치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한국에서 근무하는 전체 근로자들의 업무상 스트레스가 폭증할 리는 만무합니다. 다양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법) 시행령 [별표 3] ‘업무상 질병에 대한 구체적인 인정 기준’에서는 산업재해로서 업무상 질병의 범주인 정신질환으로 1).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2). 업무와 관련하여 고객 등으로부터 폭력 또는 폭언 등 정신적 충격을 유발할 수 있는 사건 또는 이와 직접 관련된 스트레스로 인하여 발생한 적응장애 또는 우울병 에피소드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천태만상인 정신질환에서 이것만 인정되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대법원(대법원 2014. 6. 12. 선고 2012두24214 판결)은 이를 부정합니다. 대법원은 ‘구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제34조 제3항 및 [별표 3]이 규정하고 있는 ‘업무상 질병에 대한 구체적인 인정 기준’은 구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 제1항 제2호 (가)목이 규정하고 있는 ‘업무수행 과정에서 유해·위험 요인을 취급하거나 그에 노출되어 발생한 질병’에 해당하는 경우를 예시적으로 규정한 것으로 보이고, 그 기준에서 정한 것 외에 업무와 관련하여 발생한 질병을 모두 업무상 질병에서 배제하는 규정으로 볼 수는 없다.’라고 판시하여 다양한 유형의 정신질환도 산업재해가 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소박한 시민이라도 이렇게 정신질환이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하여는 산 넘고 물을 건너야 한다는 점을 대략적이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근로복지공단은 재해자의 근무형태, 근로시간, 동종 업무에 있어서 부과되는 스트레스, 동료 근로자들과의 관계 등 다양한 요소를 검증합니다. 정신과 의사의 전문적으로 체계적인 진단내역도 당연히 확인합니다. 혹자는 정신질환을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과정 자체가 정신질환을 유발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인간의 숙명이기에, 직업병으로서 정신질환을 구분하는 멀고도 험난한 과정은 필연적입니다.
<기사>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김소희 국민의힘 의원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23년 정신질환으로 인한 산재 신청은 684건이었다. 이는 4년 전인 2019년 313건보다 2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3/0012789174 ■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별표 3] <개정 2021. 6. 8.> 업무상 질병에 대한 구체적인 인정 기준(제34조제3항 관련) 4. 신경정신계 질병 바. 업무와 관련하여 정신적 충격을 유발할 수 있는 사건에 의해 발생한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사. 업무와 관련하여 고객 등으로부터 폭력 또는 폭언 등 정신적 충격을 유발할 수 있는 사건 또는 이와 직접 관련된 스트레스로 인하여 발생한 적응장애 또는 우울병 에피소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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