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제는 똥도 좋다!
1970년대만 해도 일상에서 흔히 쓰던 말입니다. 21세기 현재, 인건비 부담 때문에 자국에서는 조립을 하지 못하는 아이폰의 나라, 그리고 최근 쇠락하기는 했지만 나이키의 나라 미국이 1970년대까지 ‘제조업의 나라’라는 당시의 사실을 이역만리 한국에서 상징하는 말이었습니다. 드라마틱한 반전이란 바로 이런 소소한 역사적 사실에서도 도출됩니다. 아무튼 그 시절에는 미제라면 최고의 상품이라는 말과 동의어였습니다.
학용품이라고 하여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미제연필은 심이 굵기는 했지만 매끈하게 종이 위를 미끄러져 가는 듯했습니다. 침을 묻히지 않으면 색이 흐려서 종이 위에 쓰기도 어렵고 연필심이 가지런하지 않아서 공책을 찢는 수준의 열악한 수준의 국산연필하고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똥종이’라 불렸던 열악한 지질(紙質)로 만들어진 교과서와 공책, 그리고 색이 도화지에 잘 묻어나지 않는 크레파스와 물감 등 그 시절 국산문구류의 수준은 처참했습니다. 미제만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제 역시 저 세상 수준이었습니다. 미제가 튼튼하고 기본에 충실했다면, 일제는 깜찍하고 매끈한 수준이었습니다. 어린 눈에도 미제와 일제는 국산과 수준 차이가 컸습니다.
먹거리라 하여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미제 비스킷과 사탕도 확실히 달랐습니다. 역한 냄새가 거북하기는 했지만, 정통 소세지의 맛을 알려준 것 역시 미제였습니다. 그리고 ‘햄소세지’란 그냥 보통의 소세지를 통칭하여 부르는 것이 아니라, 소세지 따로 햄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미제를 통하여서였습니다. 양주라 불렸던 위스키와 보드카 등도 미제가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시절의 일이었습니다. 그 시절 동네 아재들도 양담배와 양주라면 눈을 번쩍 떴습니다. 뭐든 미제라면 저 세상 수준으로 좋았습니다. 미제라면 똥도 좋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외화획득과 국산품 애용이 애국과 애족이라는 구호가 TV에서, 그리고 관공서와 학교에서 맹위를 떨쳤습니다. 외제물품을 사면 매국노 비스므레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제의 위대함을 직접 겪은 것은 ‘미제장수’ 때문이었습니다. 그 시절 ‘미제장수’는 ‘미제아줌마’ 또는 ‘미제보따리’고도 불렸습니다. 문제의 미제장수는 바로 옆집으로 미제장수 아줌마가 이사를 오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미제장수는 제 후배의 엄마였습니다. 당시 대전의 장동 미군부대 PX에서 몰래 빼돌린 미제 물건을 사서 동네 아줌마들이나 아저씨들에게 이문을 받고 되파는 방식이 그 미제장수의 영업방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미제장수 아줌마는 ‘맛보기’ 차원으로 미제상품을 동네 아줌마들에게 돌렸고 그 아들, 즉 제 후배는 자랑 차원에서 여기저기 나눠줬습니다. 그 시절 어린 마음에는 사소한 것도 자랑거리였기에, 미제 학용품을 쓰는 것은 엄청난 자랑거리였던 것입니다.
미제장수는 동네 아줌마들이 더 좋아했습니다. 미제 화장품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장동 미군부대 PX에서는 화장품도 유통이 되었습니다. 그 미제 화장품에 동네 아줌마들이 열을 올렸습니다. 처음에는 보따리장수 방식으로 물건을 팔았는데, 나중에는 그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미제장수 가족은 돈을 꽤나 버는가 싶었는지 단칸방에서 세를 살던 가족이 금새 집을 사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배가 고픈 건 참아도, 남이 잘되서 배가 아픈 건 못참는 DNA가 각인되어 있습니다. 미군PX 물품은 미군과 그 가족, 그리고 카튜샤병 등을 상대로 유통할 것을 전제로, 면세로 한국에 수입되는 물품입니다. 당연히 일반시민에 유통하면 탈세라는 범죄가 되며, 정식 수입 및 유통허가조건에 반하기에 무역 및 유통관련 법령을 위반하게 됩니다. 지금처럼 국민이 ‘미제’ 아이폰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미제장수 아줌마는 그 이후에 경찰서를 들락가렸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었지만, 무슨 영문인지 동네에서 볼 수는 있었습니다. 세월이 꽤나 흘렀습니다. 미제장수의 추억이 불과 몇십 년에 불과한데, 이제 상당수 한국인이 동남아산이나 인도, 중국산이라면 의심의 눈초리부터 보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외국인근로자가 국내에서 농업, 어업, 그리고 공장에서 활동하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격세지감이란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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