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면 맹위를 떨치던 말이라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쓰이더라도 제한적으로 쓰이는 경우를 더하면 그 숫자는 더욱 많게 됩니다. 1970년대에 맹위를 떨치던 말 중에서 ‘새마을 운동’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새마을 운동’이라는 말 자체가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이 노래에서 등장하는 ‘초가집’이나 ‘마을길’과 같은 말도 요즘은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실은 위 말 중에서 초가집은 초가집 자체가 없어졌기에,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경우입니다. 물론 그 반대로 신조어도 등장합니다.
○직장생활에서 쓰이는 말도 당연히 신생과 사멸을 합니다. ‘처세술’이라는 말은 1980년대에 맹위를 떨치던 말이었습니다. 요즘은 종이신문 자체가 거의 보기가 어렵지만, 그 시절에는 가정은 물론 직장에서 종이신문은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종이신문의 하단광고에서 처세술 관련 서적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았습니다. 일본의 유명 저자의 서적을 직역했노라고 자랑스럽게 광고하는 서적광고도 많았고, 국내 유명 대학의 교수가 지은 처세술 서적광고도 홍수 수준으로 많았습니다. 요즘은 잘 보지 않는 수필집에서도 어지간하면 처세술이 양념격으로 등장했습니다. 처세술과 화술을 겸한 학원까지 성황이었습니다. 참으로 격세지감입니다.
○그런 시대적 배경인지라 1987년부터 방영된 ‘TV손자병법’은 상당 부분 처세술을 다루고 있습니다. 직장생활에서 샐러리맨들의 애환을 담담하게 그리기도 했지만, 직장생활에서의 암투와 승진, 사내정치, 그리고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에서 닥치는 갖가지 에피소드 속에서의 처세술을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처세술이 생존방식을 넘어 시대적 요구이기에, 드라마 속의 인물도 조조, 여포, 유비 등 ‘삼국지연의’에서 등장하는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삼국지연의가 처세술의 모범답안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때 그 시절에는 삼국지연의를 몇 번 읽지 않으면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당위로 받아들여지는 시절이었고, ‘인생은 하륜처럼’과 같은 하륜식 처세술이 모범답안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한명회식 처세술이나 일본 소설 ‘대망’의 주인공 도쿠가와 이에야스식 처세술이 각광(?)을 받기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okr8MFntHA
○처세술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인간관계를 둘러싼 삶의 방식의 하나이기에, 그 명칭과 무관하게 2023년 현재에도 쓰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2014년에 방영된 ‘미생’에서도 간접적이나마 처세술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처세술은 근로자 개인의 실제 능력 이상으로 발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사평가시스템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개인이 가진 역량을 그 역량의 정당한 평가가 아닌 인간관계로 푸는 것은 재택근무가 활성화된 현재의 시점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처세술이 능한 사람이 만든 제품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없음에도 유달리 처세술이 강조되는 것도 의문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생활이 필수적인 기업 내부에서 처세술이란 어쩌면 생존전술일 수도 있습니다. 직장인에게 닥치는 크고 작은 시련을 극복하는 것도 처세술의 일종이기 때문입니다. 직장인에게 닥치는 문제는 전적으로 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14년에 방영되면서 생생한 직장생활의 애환을 그린 ‘미생’이 많은 직장인들의 공감을 얻은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기인합니다. ‘미생’은 직장 내에서 빌런을 생생하게 그려서 더욱 현실감을 배가시켰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WOgeM_W-7g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사회생활을 한다면 자신과 갈등관계에 있는 인물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학교, 군대, 직장, 동호회 등 다양한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신과 궁합이 맞는 사람도 만나기 마련이지만, 맞지 않는 것을 넘어 원수지간이 되는 경우도 겪게 되는 것은 어쩌면 사람의 숙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TV손자병법’에서는 그냥 둥글둥글하게 그렸던 사내 인간관계의 묘사가 ‘미생’에서는 적극적으로 빌런이 등장하는 것으로 진화합니다. 그 중에서 제일 공감을 많이 받은 사연은 바로 ‘성 대리’라는 빌런의 악행입니다. 공은 가로채고, 과는 부하직원에게 넘기면서 상사의 시각을 훼손하고, 부하에게 술값을 떠넘기는 악행이 직장인은 물론 시청자의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그런데 묘한 대목이 있습니다. 상사들은 물론 동료들도 성 대리의 악행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유·불리를 고려하여, 실은 성 대리의 악행을 사실상 방조하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점입니다. 그들에게는 어쩌면 이런 방식이 ‘슬기로운 직장생활’일 수도 있다는 점을 드라마 ‘미생’이 폭로하는 것입니다. 공동의 목표를 지니고 있는 직장동료들이지만, 그 내면에는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의 추구하는 이기적 속성이 진하게 묻어나는 셈입니다. 싸우면서도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그러면서도 이해타산을 고려하는 직장인들의 생생한 묘사는 처절한 삶의 현장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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