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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추억의 그 이름 강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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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편안하게 안방에서 배를 깔고 TV중계를 보면 족할 것을 왜 경기장에서 현장관람을 하는가, 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현장관람은 TV시청과 비교할 수 없는 박진감이 있습니다.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응원가에 마치 마약에 취한 듯 영혼이 진동하는 그 감정은 TV시청만으로는 절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선수들의 실제 모습과 생생한 플레이는 TV로는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야구선수들은 실제보다 덩지가 크다는 것, 축구선수들은 비호처럼 빠르게 경기장을 달린다는 것, 농구나 배구선수들은 실제로는 장대같이 크기도 하거니와 점프를 하면 마치 커다란 새처럼 보인다는 것 등은 모두 경기장에서만 실제 눈으로 보면 확인이 가능합니다.

 

‘백구의 대제전’이라 불리는 배구리그는 1984년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당시 기사의 검색으로 확인이 가능하지만, 정작 ‘백구의 대제전’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개최되었다는 점, 그리고 상당기간 무료였다는 점 등은 쉽게 확인이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1984년 당시에 ‘백구의 대제전’에 참가한 당대 최고의 배구선수들을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실물로 본 기억은 확인 이전에 재생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오롯이 실제 현장관람을 한 관객들의 기억에서만 잔상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TV에서만 보던 장윤창의 오픈스파이크와 스파이크서브, 이종경의 파워블로킹, 단신 이채언의 대포알 스파이크, 비상하는 학과 같았던 이상렬의 백어택, 그리고 강두태의 속공과 오픈스파이크는 그 관객들 중의 하나였던 제 기억에 아직도 생생합니다.

 

당시 현장에서 감상했던 강두태는 수비와 공격 모든 면에서 당시 소속팀인 금성사에서 에이스임을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야전사령관처럼 코트위에서 동료 선수들에게 손짓을 하면서 뭔가 지시를 하면서도 공수를 주도하는 것이 요즘의 표현대로, ‘멋이 뿜뿜’이었습니다. 그렇게나 키가 큰 선수가 마치 새처럼 날아올라 전광석화같은 오픈스파이크를 날리는 것이 기가 막혔고, 상대방의 고공강타를 블로킹으로 막아내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당시 현장에서 본 강두태는 금성사의 알파요 오메가였습니다. 그 이후로 강두태만 나오면 유심히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실은 그 시절에 ‘강두태’라는 이름부터 뭔가 쎄고 강렬한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당시 금성사는 강두태의 원맨팀에 그쳤습니다. 고군분투를 했어도 당시 강호인 고려증권과 현대차서비스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종경과 이채언이 이끄는 경기대에도 밀리는 느낌이 확 들었습니다. 간판공격수이기에 서브는 강두태에게 집중이 되었고, 나중에는 힘에 붙이는 것이 관중석에서도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강두태 금성사’는 그렇게 무너졌고 결승전으로 가지는 못했습니다. 애처로운 강두태 원맨쇼로는 결승에 도달하기 어려웠습니다. 결승전은 장윤창의 고려증권과 이채언의 경기대가 붙었습니다. 이종경의 센터블로킹과 이채언의 레프트 스파이크가 불을 뿜었지만, 아무래도 장윤창의 라이트 스파이크와 정의탁의 속공과 블로킹을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렀습니다.

 

대전의 동양백화점(대전사람들은 줄여서 주로 ‘동백’으로 불렀고, 나중에 ‘갤러리아 동백점’, 그리고 ‘NC백화점 중앙로역점’으로 변경)에서 강두태를 봤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배구코치를 하는 사람이 왜 동백에 나타났는지 이런저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강두태가 워낙 키가 큰 사람이기에 눈에 확 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동백 입점업체의 사장이라는 소문이 이어졌습니다. 대전에서 자리잡고 사업을 하는가 싶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에서 강두태의 부고가 떴습니다. 나무위키 등 인터넷에 떠있는 ‘대전에서 사업’이란 바로 동백에서 입점업체의 사장으로 활동한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대전이 연고가 아닌 강두태가 왜 대전에서 사업을 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은퇴 이후 팀의 코치를 맡다가 물러난 뒤 대전에서 사업을 하다가 1991년 3월 26일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나무위키 등에 실린 ‘강두태’ 항목 등-

 

한창인 나이에, 게다가 운동선수 출신의 강두태가 고인이 되었다는 소리가 믿기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점프를 하면서 고공강타를 내려꽂던 강두태의 강스파이크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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