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 배국남이 의학드라마라는 것의 실체는 거의 예외없이 연애드라마라고 맹렬히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배국남의 지적대로 역대 의학드라마에서는 응급실이 등장하고 앰뷸런스가 등장하면서 긴박한 상황이 연출되지만, 결국에는 사랑놀음을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이 의학드라마의 냉정한 현실이었습니다. 의사가 엄청나게 힘들다는 설정이 등장하지만 그 와중에 연애전선은 언제나 뜨거웠습니다. 심지어 ‘대장금’에서도 연애전선은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의학드라마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장면이 해당 응급상황의 법률적 문제입니다.
○가령, 교통사고로 응급환자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형법상 업무상과실치사상죄, 교통사고처리특례법 등의 형사법, 도로교통법 등의 행정법, 민법상 불법행위책임, 사용자책임 등의 손해배상책임부터 건강보험법상 보험급여, 산재보험법상의 산재보험급여, 그리고 상법상 보험급여, 각종 공제에 의한 공제급여가 등장하는 민사법까지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무수히 많은 법률적 쟁점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의학드라마에서 이런 법률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법정드라마에서도 형사상 책임여부 등에 대한 것이 주된 것입니다.
○시험에 나오지 말라고 간절하게 주술에 가까운 기도를 해도 비정하게도 피하고 싶은 바로 그 문제가 나오는 법입니다. 법률의 영역에서는 치료와 장해라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법입니다. 교통사고라는 역사적 사실은 무수히 많은 법률이 정한 요건을 충족하기 마련입니다. 의학드라마가 외면해도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그런데 의학드라마가 이렇게 그려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교통사고에 의하여 중상을 입은 환자는 교통사고가 건강보험사고인지 산재사고인지, 나아가 범죄피해자인지에 따라 그 증세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암에 걸린 환자가 산재사고라 하여 치료법이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의사의 치료행위는 환자의 증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법률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은 너무 당연해서 우스운 감마저 듭니다.
○그러나 치료비의 결정, 장해등급의 결정 등 의사의 치료행위에 따른 결과는 각종 법률에 따라 달라집니다. 가령, 산재법과 각종 보험에 의한 장해등급은 다를 수 있습니다. 속칭 ‘동사무소장애’라 불리는 장애인연급법에 의한 장애등급은 명칭 자체가 다릅니다. 국민연금법상 장애연급도 ‘장해’가 아닌 ‘장애’를 씁니다. 의사는 환자에 대하여 의술에 따른 치료를 했고, 그에 따른 결과가 동일하더라도 각종 단행법은 법률적 평가를 달리 할 수 있습니다. 다음 대법원 판결(대법원 2023. 7. 13. 선고 2021다283742 판결)에 등장하는 장해등급의 사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대법원 판결의 주요 쟁점은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약관규제법)’ 제5조에 따른 약관의 해석기준입니다. 보험회사와 거의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공제회사는 공제약관상 ‘장해상태가 신체의 동일부위에 발생한 경우’의 의미를 넓게 해석했습니다. 그리하여 ‘인지기능저하와 실어증이 각 ‘말하는 기능을 완전 영구히 잃은 장해’(제1급 2호)와 ‘중추신경계에 뚜렷한 장해를 남겨서 평생토록 수시간호를 받아야 하는 장해’(제2급 1호) 둘 다 중추신경계의 손상이 원인이 되어 나타난 장해로서 ‘신체의 동일부위에 발생’한 장해라고 판단하여, 그중 최상위 등급인 제1급 2호에 해당하는 공제금만 지급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흔히 중풍이라 부르는 뇌졸중은 중추신경계의 이상을 말하며, 신체의 여러 부위에 장해를 일으킵니다. 관점에 따라 이러한 장해를 모두 중추신경계의 장해라 볼 수도 있고, 각 장해부위마다 다른 장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중추신경계의 이상으로 발생하여 입과 뇌의 기능에 장해를 남긴 산재사고가 있다고 가정을 합니다. 산재법은 1). 입의 기능장해 중에서 ‘언어장해’, 그리고 2). 신경계통의 기능 또는 정신기능의 장해 중에서 ‘중추신경계(뇌)의 장해’와 ‘척수의 장해’를 각각 독립한 장해로 봅니다. 대법원은 약관규제법상 약관해석의 법리에 따라 공제계약 약관이 정하는 ‘장해상태가 신체의 동일부위에 발생한 경우’란 문언 그대로 동일한 신체부위에 발생하여 ‘존재’하고 있는 장해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아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였습니다.
○산재법이 별개의 장해등급으로 규정한 것은 직접 당해 사건의 해석의 준칙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해석의 참고기준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박한 국민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중추신경계에서 발생한 모든 장해를 동일하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산재법은 국가배상법상의 장해등급을 차용하여 제정했습니다. 장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의 신체에 남겨진 후유증이기 때문입니다.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약관”이란 그 명칭이나 형태 또는 범위에 상관없이 계약의 한쪽 당사자가 여러 명의 상대방과 계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일정한 형식으로 미리 마련한 계약의 내용을 말한다. 제5조(약관의 해석) ① 약관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해석되어야 하며 고객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서는 아니 된다. ② 약관의 뜻이 명백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5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4. “치유”란 부상 또는 질병이 완치되거나 치료의 효과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고 그 증상이 고정된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을 말한다. 5. “장해”란 부상 또는 질병이 치유되었으나 정신적 또는 육체적 훼손으로 인하여 노동능력이 상실되거나 감소된 상태를 말한다. <대법원 판례> 약관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해당 약관의 목적과 취지를 고려하여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해석하되, 개개 계약 당사자가 기도한 목적이나 의사를 참작하지 않고 평균적 고객의 이해가능성을 기준으로 전체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객관적․획일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위와 같은 해석을 거친 후에도 약관조항이 객관적으로 다의적으로 해석되고 그 각각의 해석이 합리성이 있는 등 해당 약관의 뜻이 명백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야 한다(대법원 2017. 10. 26. 선고 2016다239536 판결 등 참조). (대법원 2023. 7. 13. 선고 2021다283742 판결) |
법률은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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