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과 드라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집중해서 본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마술은 단지 눈속임에 불과하지만, 드라마는 그 이상입니다. 배우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분해서 연기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인생사의 희로애락까지 느낍니다. 배우의 대사와 동작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시청자는 열광을 합니다. 심지어는 훌륭한 연기라는 거짓말에 대하여는 상까지 수여합니다.
실은 이러한 일련의 사실은 누구나 아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더욱 간과하는 것은 드라마를 가장 열심히 보는 사람은 시청자가 아니라 경쟁 드라마제작사의 임직원이나 동종업계 배우들(일명 ‘업계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손흥민이 활약하는 PL을 연상하면 쉽습니다. 상대팀은 3D컴퓨터까지 동원하여 상대팀의 전술을 분석합니다. 드라마는 반복하여 보는 것은 짜증이 나지만, 상대팀의 분석은 반복에 반복을 거듭합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말하는 ‘업계사람들’이 드라마를 제일 많이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의외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드라마의 시청자들이 관심 자체가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전에 KBS의 고참 PD인 고찬수 PD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업계사람들’입니다( 익명으로 고찬수 PD를 서술하려다가, KBS PD협회장까지 지낸 사람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도 등장하는 고교 동문인 그를 굳이 익명으로 하는 것이 오히려 무책임하다 싶어서 실명으로 서술합니다). 그가 저에게 전한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드라마를 가장 열심히 보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업계사람들’이야. JTBC의 ‘스카이캐슬’을 보고 깜짝 놀랐어. 우리 같은 업계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면 꼭 드라마 제작비를 따져봐. 일종의 직업병이지. 그런데 우리(KBS)가 보통 만드는 드라마제작비를 거의 두 배를 쓰더라. 이래서는 경쟁력이 안 되지. 케이블이나 종편에서 마음 먹고 만드는 드라마는 퀄리티가 이미 저 너머의 퀄리티야. 우리(KBS)는 시어머니가 많아서 그렇게 만들기가 어려워. 우리는 관공서에서 출발했기에 갑질하는 공무원 마인드야. 우리가 잘 하는 것은 외주제작사에 정확하게 대금을 지급하는 것 외에 도무지 내세울 것이 없어.
고찬수 PD의 발언은 업계사람들은 물론 드라마제작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닙니다. 고찬수 PD의 위 발언에 덧붙일 것이 있는데, 그것은 드라마제작사가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을 중점적으로 캐스팅한다는 말입니다. 평생 배우를 했던 문성근 배우는 후배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감탄한 적이 무수히 많다고 탄복을 했습니다. 드라마 자체의 퀄리티가 높아지고 배우들의 연기력이 엄청 높아졌다는 말입니다. 괜히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가 아시아시장의 교두보로 한국을 지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드라마제작능력은 단연 아시아 넘버원입니다. 그 능력 중에는 당연히 연기력을 검증하는 능력도 포함합니다.
얼마 전에 유튜브로 ‘재벌가 막내아들’을 봤는데, 출연배우들은 한결같이 연기도사들이었습니다. 주연인 고향 대전 후배 송중기가 제일 못한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출연배우들의 연기는 발군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유튜브로 ‘더 글로리’를 봤습니다. 출연배우들의 연기력이 너무나 실감이 가서 실제로도 출연배우들이 과거에 학폭을 했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다른 출연배우들보다 실제 나이를 더 먹어서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 외에 송혜교의 연기 자체는 무척이나 훌륭했습니다. 귀여운 소녀로만 여겨졌던 송혜교의 멋진 변신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더 글로리’는 플롯에서도 발전이 있었습니다. 복수극은 흔히 ‘선과 악’이라는 구도에 함몰되기 쉬운데, 복수를 하는 송혜교를 일방적으로 ‘선’으로만 그리지 않은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글로리’가 제일 멋지게 그린 점은 바로 학폭 가해자들인 악의 내부진영을 상세히 그리면서 뭔가 현실감을 강하게 그렸다는 점입니다. 가해자들의 서열놀이, ‘악의 평범성’이 연상되는 가해자들의 평범성, 그리고 가해자들 간의 알력 등 과거 천편일률적인 복수극에서 발전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라는 걸출한 복수극에서도 정작 가해자들에 대한 디테일은 약했습니다.
1970년대부터 드라마를 봤던 제 입장에서는 21세기 드라마의 눈부신 발전에 그저 놀랄 따름입니다. 과거 1970년대에는 야외촬영만 있어도 신문에 기사가 날 정도로 스튜디오에서 날림으로 촬영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쪽대본으로 상징이 되는 드라마의 날림제작도 커다란 병폐였습니다. 열악한 제작시스템이 과거 드라마 속 배우들의 열연을 갉아먹었습니다. 그래서 21세기 드라마를 업그레이드 시킨 업계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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