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기(張貞起)와 장정기(藏精器)>

장점이란 동시에 단점인 경우가 많습니다. 한자는 의미를 정확하게, 게다가 압축적으로, 표기를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동음이의어의 혼돈을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장점은 동시에 단점이 됩니다. 한자를 두루 아는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겠지만, 한자에 능통하지 않은 사람에게 한자의 해득, 나아가 한자를 통한 의사의 소통이란 고통 그 자체입니다. 소리글자인 알파벳이나 한글만으로 구성되는 언어체계에서는 대부분의 의미가 단지 발음만으로 소통이 되는 것에 비하여, 표의문자인 한자로 이루어지는 중국어는 그 방대한 글자 때문에, 회화는 별론으로 하고, 문맹자를 양산하기 십상입니다. 배우기 어렵기에 언중들은 한자를 기피하기 마련입니다. 1980년대까지 위력을 발휘했던 국한문혼용론(國漢文混用論)이 소리 소문이 없이 사라진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자습득의 어려움과 소통의 고통 때문에 중국의 저명한 소설가 노신이 ‘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은 반드시 망한다(漢字不滅，中國必亡).’라고까지 말할 정도였습니다. 노신 시대 이후 근 백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에서는 한자학습의 어려움 때문에 문맹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노신이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한자는 동아시아 언어생활의 근간을 넘어 문명생활의 터전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동아시아 언어의 근간이 한자이기에, 한자의 직·간접적인 활용으로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도 의사의 소통을 넘어 신조어나 축약어 등을 통한 언어문화의 발전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고급어휘의 축적은 한자이기에 가능합니다. 문명생활의 영위는 기본적으로 언어생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은 21세기 물질문명의 축적은 영어와 더불어 한자가 이룩한 토대에서 가능하였다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창하고 장황하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현대인이 쓰는 어휘에서 한자로 병치하지 않으면 그 의미가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밤하늘의 별처럼 많습니다. 당장 장정기(張貞起)와 장정기(藏精器)를 보면 그것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삼미슈퍼스타즈라는 지금은 사라진 프로야구단의 창단멤버 장정기(張貞起)와 생물학 용어인 장정기(藏精器)인 한자로만 쓰면 전혀 연결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양자는 모두 동음이기에 전후 사정이나 문맥을 알지 못하는 이상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장정기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원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장정기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생물시간에 배운 식물의 유성생식기관으로 장란기(藏卵器)와 더불어 기능하는 장정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야구선수 ‘장정기’는 생물시험을 보더라도 절대로 유성생식기관 ‘장정기’에 대한 문제는 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코믹한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실은 저 자신도 생물시험에서 장정기가 괄호넣기의 정답인 문제를 숨도 쉬지 않고 정답을 쓴 기억도 있습니다. 이름이 특이해서인지 유달리 장정기의 타격을 유심히 보기도 했습니다. 그 이전에 대전 연고의 OB베어스에게 1년 내내 지기만 하는 삼미슈퍼스타즈를 저절로 응원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프로야구 중계의 역사로 남은 정도영 캐스터가 ‘장’ 발음 뒤에 약간 간격을 두고 ‘정기’라고 발음하던 것만 떠오를 정도로 장정기에 대한 기억 자체는 미미합니다. 실제로도 기록을 찾아보니 그냥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장정기라는 이름 자체는 또렷한 것을 보면 생물시간에 배운 장정기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동음이의어라는 이유만으로 아직도 두 장정기 모두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 한자의 필요성을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