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TV를 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부터입니다. 그런데 그 시절부터 엄청나게 짜증이 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방송국이 경쟁프로그램을 동 시간대에 하는 것입니다. 갑 방송국이 만화영화를 방영하면, 동 시간에 을 방송국도 덩달아 만화영화를 하고, 을 방송국이 드라마를 하면, 덩달아 동 시간에 갑 방송국도 꼭 드라마를 했습니다. 뉴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졸지에 양자택일의 상황이 꼭 발생했습니다. 쇼프로그램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외화라고 예외도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꼭 갈등의 상황을 만드는 방송국들이 무척이나 미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갈등의 상황을 만들게 되는 것은 방송국의 프로그램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과업계에서도 의류업계에서도 꼭 라이벌격인 상품을 만들어서 꼭 고민과 번민을 강요하는 짜증나는 선택의 순간을 만들었습니다. 자본주의경제는 선택가능성을 전제로 성립되는 시스템이지만, 어린 마음에 이런 유형의 갈등유발자들(!)이 무척이나 미웠습니다. ‘칠성사이다’를 마시려면 저쪽에서 ‘킨사이다’가 째려보았고, ‘해태브라보콘’을 먹을라치면 애처롭게 ‘롯데티나콘’이 바라봤습니다. ‘해태에이스크래커’를 먹으려 하면, 저 건너편의 ‘롯데빠다코코낫’이 유혹을 했습니다.
물론 ‘맥콜’과 ‘보리텐’과 같이 체급차이가 많이 나는 전쟁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음료수 전쟁은 불꽃이 튀었습니다. 초창기 음료수는 비교적 저렴한 ‘환타’와 ‘써니텐’, 그리고 ‘칠성사이다’와 ‘킨사이다’ 간의 대결이었지만, 생활수준이 업그레이드 되면서 마침내 프리미엄 쥬스 간에 대결이 벌어졌습니다. ‘델몬트’와 ‘썬키스트’라는 프리미엄 오렌지 쥬스 간의 경쟁은 거의 전쟁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TV를 켜면 이 라이벌 쥬스 광고 전쟁이 어금지금 쉴 새 없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TV광고로만 한정한다면 단연 델몬트가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지금도 언중들의 애용을 받는 브라질어(포르투갈어)인 ‘따봉’의 신화를 낳은 델몬트는 대박을 넘어 아직까지도 광고업계의 전설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iSn7k0yXE0
그런데 슬프게도 델몬트의 ‘따봉’은 광고심리학계에서 대표적인 벰파이어효과(흡혈귀효과)로 끊임이 없이 소환되어 아직까지도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은 ‘따봉’의 괴력에만 주목을 하여 정작 따봉이 델몬트의 따봉인가, 아니면 썬키스트의 따봉인가 헷갈렸기 때문입니다. CF 자체는 대박이 났지만, 정작 그 제품은 광고효과를 누리지 못한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벰파이어효과는 벰파이어가 등장하면 나머지 배우들과 배경 등을 모조리 잡아먹는 광고의 부정적 효과인데, 따봉이 벰파이어가 된 것입니다. 델몬트 측에서는 최진희라는 당대 최고인기 트로트가수를 동원하여 ‘델몬트 따봉쥬스’라는 제품의 CM송을 부르게까지 합니다. 따봉이라는 벰파이어를 델몬트에 강제로 소비자에게 주입시키려는 처절한 노력의 결과인 것은 물론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pnCqpJZZ3U
라이벌 썬키스트는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따봉의 위력에 주눅들지 않고 돈을 많이 들인 감각적인 CF를 연이어 제작했습니다. 당시 썬키스트나 델몬트 모두 광고전쟁에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제품의 CF는 지금 봐도 퀄리티가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들 프리미엄 쥬스는 용기로 쓰인 독특한 유리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습니다. 다 마신 후에도 쥬스용기가 ‘국민보리차병’으로 각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쥬스도 고급이고 유리병도 고급이어서 이 두 쥬스를 받으면 살림살이까지 덩달아 받는 망외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SBS 앵커의 멘트는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델몬트만이 문제의 유리병에 담긴 것으로 오인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괜히 라이벌이 아닙니다. 썬키스트도 유리병에 담겨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dL5Ff8mWiM
https://www.youtube.com/watch?v=-bu8wu3MzaA
그런데 약속이나 한 듯이 이 라이벌들의 전쟁은 스포츠음료나 이온음료 등 새로운 시장이 개척되면서 슬며시 종전이 되었습니다. 시장이 뜨거울 때나 라이벌이지 시장 자체가 죽으면 라이벌이란 의미가 없다는 냉정한 시장의 이치를 각인시켰습니다. 그러나 델몬트와 썬키스트의 피나는 전쟁은 비록 종전이 되었어도 아직까지도 즐거움을 소환하는 재미있는 전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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