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MBC 청룡’>
최강야구의 캡틴 박용택은 LG 트윈스에서도 캡틴이었습니다. 운동선수는 무식하다는 일부의 근거 없는 선입견을 말끔히 지울 정도로 사람 자체가 샤프합니다. 말을 할 때마다 조리있게 말도 잘하고 내뱉는 고급단어에서도 해박하다는 인상이 풍기는 인물입니다. 그 박용택이 예전에 ‘MBC 청룡’ 레트로 유니폼을 입은 사진을 보고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MBC 청룡을 이끌던 추억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검색해 보니 박용택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으며, 문제의 ‘Chung Yong’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원년 유니폼은 원년 딱 한해만 입었기 때문입니다. 한글 발음인 ‘청룡’을 영어로 굳이 ‘Chung Yong’이라 표기한 것은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1983년, 즉 원년 다음 해 동계훈련영상을 안내했습니다. 일단 반갑고 그리운 얼굴이 추억을 소환하였고, 열악한 동계훈련장이 허전함을 불렀습니다. 이제 고인이 된 하기룡, 이길환, 송영운 등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원년 개막전 선발투수로서 선린상고 재학 당시에 엄청난 혹사로 논란을 빚었던 이길환, ‘돼지’라는 별명처럼 육중한 체구를 자랑했던 에이스 하기룡, 그리고 고 김동엽 감독에게 본헤드 플레이로 두들겨 맞았던 송영운을 보면서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MBC 청룡 중계를 주로 했던 캐스터로는 원년에는 고 김용 캐스터가 많이 했고, 그 이후에는 고창근, 양진수 등의 캐스터가 많이 했습니다. 캐스터와 무관하게 MBC 청룡은 ‘편파중계’ 시비가 많았습니다. 실제로도 자사가 운영했던 팀이기에 팔이 안으로 굽었던 중계가 역력했습니다. 그럼에도 ‘MBC’라는 문구가 마치 자사를 응원하는 것으로 비춰질까봐 일관하여 ‘청룡’이라고만 멘트를 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전두환 정부의 압력인지 아니면 자사의 흥행을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당시에는 야간경기는 물론 주간경기도 자주 TV중계를 했습니다. 심지어 라디오중계는 주중에도 많이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JS4xRXhEhA
MBC 청룡은 개성이 강한 선수들 집합소였습니다. 투구동작이 엄청나게 느려서 상대 타자들로부터 원성을 주야장창 듣다가 김성한의 그 유명한 ‘웃짱사건’을 유발한 오영일, 아마시절의 강속구는 잃어버리고 제구력만 그대로 들고 온 정순명, 만담가 이광권, 고교시절의 우정을 프로에도 갖고 간 백넘버 32, 33, 34번을 나란히 달았던 신언호, 이광은, 그리고 하기룡, 아마 7관왕의 명성에 비하여 활약이 그냥 그랬던 김재박, 그리고 작은 체구에 비하여 몸 맞는 공이 많았던 악바리 김인식 등 MBC 청룡은 개성 집합소였습니다. 쌕쌕이로 호타준족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원조 ‘소녀어깨’ 이해창도 빠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개성은 단연 백인천입니다. 팬들은 원년 4할 1푼2리만 주야장창 말하지만, 그 이후로는 타격성적이 처참했으며 간통으로 감옥까지 갔던 이야기는 늘 빼고 말합니다. 원년에는 투수들의 상대분석이 약해서 백인천의 몸쪽 공에 대한 약점을 간과했지만, 백인천은 노장이라 몸쪽 강속구에는 속수무책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역시 투수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강속구입니다. 그리고 백인천은 1년을 갖 넘기고 방출을 당해서 1983년 한국시리즈의 지휘봉은 고 김동엽 감독이 잡았습니다. 슬프게도 김동엽 감독은 오래 지휘봉을 잡지 못하고 짤렸습니다.
MBC 청룡은 성적도 성적이지만, 공영방송을 지향하는 공중파방송이 특정 팀을 운영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LG 트윈스로 팀을 매각했습니다. 놀랍게도 그해에 우승을 차지했고, 그 감독이 백인천이라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이제 LG 트윈스는 LG그룹의 간판이 되었기에 당분간 매각의 여지는 없다고 봅니다. 고 구본무 회장의 LG 트윈스에 대한 애정이 유별났기 때문입니다. LG 트윈스에 대한 팬의 충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랑을 받을수록 MBC 청룡의 기억은 역설적으로 희미해져 갑니다.